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58)

[우리 말에 마음쓰기 895] '특별한 존재', '놀고먹는 존재' 다듬기

등록 2010.04.06 11:40수정 2010.04.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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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특별한 존재

 

.. 하지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다기보다는, 철이 들 무렵부터 나와 타자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고 그 너머로는 절대로 건너갈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유미리/김난주 옮김-물가의 요람>(고려원,1998) 49쪽

 

'하지만'은 '그러하지만'이나 '그렇지만'으로 고쳐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투를 옳고 바르게 가눌 줄 아는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자신(自身)이'는 '스스로가'나 '나를'로 다듬고, '특별(特別)한'은 '남다른'으로 다듬으며, '타자(他者)'는 '남'이나 '다른 사람'으로 다듬습니다. '절대(絶對)로'는 '도무지'로 손질하고, "있었던 것이다"는 "있었던 셈이다"나 "있었다"나 "있었던 모양이다"로 손질해 줍니다.

 

 ┌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다기보다는

 │

 │→ 특별하다고 여겼다기보다는

 │→ 남다르다고 여겼다기보다는

 │→ 남과 다르다고 여겼다기보다는

 │→ 무언가 다르다고 여겼다기보다는

 └ …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입니다. 글쓴이는 어릴 적에 '어린 당신'하고 '똑같이 어린 다른 동무'하고는 사뭇 다른 사람이 아니냐고 느꼈다고 합니다. 어린 나날에도 생각하고 어른이 되고도 생각하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어린 날 유미리 님은 어린 나날에도 당신 삶을 '존재'라는 낱말로 돌아보았을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 나서 어린 날을 돌아보며 '존재'라는 낱말을 꺼냈을는지 모르고요.

 

곰곰이 헤아리면, 어린이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나는 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여길 때에는 '남다른 모습이 나한테 있다'고 느낄 테고, 이와 같은 느낌을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 다르면서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느냐가 갈리는구나 싶습니다.

 

 ┌ 남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다기보다는

 ├ 퍽 다른 아이라고 여겼다기보다는

 ├ 한결 돋보이는 사람이라고 여겼다기보다는

 ├ 눈에 띄는 아이라고 여겼다기보다는

 └ …

 

가만히 따지면, 다르지 않은 아이란 없습니다. 다르면서 아름답지 않은 아이란 없습니다. 다만, 돋보인다든지 눈에 뜨인다든지 하는 아이란 드물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돋보인다는 대목에서도 다시금 헤아리다 보면, 내가 낳아 기르는 내 아이처럼 나한테 돋보이는 고운 목숨이란 없습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어버이 되는 사람은 제 아이를 곧바로 알아챕니다. 어슷비슷한 어른들이 우글우글 있어도 아이는 제 엄마나 아빠를 바로바로 알아냅니다.

 

저 스스로 어버이라는 자리에 서며 아이와 살아가면서 '돋보임'이든 '눈에 뜨임'이든 누구한테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저를 낳아 기르며 저를 아이로 바라보는 우리 어버이들도 매한가지일 테지요. 서로서로 애틋하게 바라보며 돌볼 수 있고, 서로서로 사랑스레 마주하며 눈에 뜨이는 좋고 궂은 매무새를 살피면서 넉넉히 껴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이고, 이 사랑은 삶으로 이어지며, 이 사랑은 삶에 녹아나는 고운 말로 태어납니다.

 

 

ㄴ. 놀고먹는 존재

 

.. 집에 틀어박혀 청소하고 아기를 돌보는 일이 내 하루일 전부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게 된다. 놀고먹는 존재가 아니라는, 나도 하는 일이 있다는 걸 기를 쓰고 입증하고픈 심정이 되는 것이다 ..  <안미선-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철수와영희,2009) 29쪽

 

'청소(淸掃)하고'는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쓸고 닦고'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전부(全部)'는 '모두'로 다듬고, "신경(神經)을 쓰게"는 "마음을 쓰게"로 다듬으며, "심정(心情)이 되는 것이다"는 "마음이 된다"로 다듬어 줍니다. '입증(立證)하고픈'은 '보여주고픈'으로 손질하고, "기(氣)를 쓰고"는 "있는 힘을 다해"나 "이를 악물고"로 손질해 봅니다. "있다는 걸"은 "있음을"이나 "있다고"로 고쳐씁니다.

 

 ┌ 놀고먹는 존재가 아니라는

 │

 │→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 놀고먹는 주제가 아니라는

 │→ 놀고먹는 삶이 아니라는

 │→ 놀고먹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라는

 │→ 놀고먹는 군식구가 아니라는

 └ …

 

집안일 만큼 거룩한 일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정작 이 거룩하다는 일을 남자들이 함께 맡는 일은 퍽 드뭅니다. 가끔 아주 살짝 한두 가지 거들기는 해도, 집안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거나 돌아가는가를 낱낱이 느끼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뿐더러, 해도 해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집안일입니다. 집안일을 하는 사람한테 돈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집안일을 하는 사람 마음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바라보지 않으니 고단하기 그지없습니다.

 

집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데, 사람들은 누구나 참으로 손쉽게 집안일을 얕봅니다. 깎아내립니다.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놀고먹는다고 여기며, 바깥일을 하는 사람은 땀흘리고 애쓴다고 여깁니다.

 

 ┌ 놀고먹지 않는다는

 ├ 놀고먹지는 않는다는

 ├ 놀고먹고 있지 않다는

 └ …

 

우리 삶이 참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할까요. 우리 삶이 제길을 걷지 못한다고 할까요. 참일과 참놀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가운데, 참사랑과 참믿음을 나누지 못한다고 할까요.

 

이런 탓에 집안일을 하건 집밖일을 하건 어느 일이나 아름다우며 뜻이 있음을 깨닫지 않습니다. 깨닫지 않으니 사람과 사람을 나누고 쪼개고 가릅니다. 사람과 사람을 나누고 쪼개고 가르니 이 땅에 민주와 평화와 통일과 복지가 깃들지 못합니다. 이러면서 우리 스스로 서로를 억누르고 제 밥그릇을 챙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니 옳고 바르게 생각하는 품새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뒤틀린 삶이 그예 뒤틀린 생각으로 이어지는 꼴인데, 마침내 뒤틀린 말로 이어집니다. 바른 삶과 바른 생각이라면 바른 말일 테지만, 어긋난 삶과 어긋난 삶에서는 어긋난 말입니다. 맑은 눈길과 싱그러운 손길이라면 맑고 싱그러운 말길일 테지만, 추레한 눈결과 짓궂은 손결이라면 추레하고 짓궂은 말결이고 맙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4.06 11:40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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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우리말 #한글 #한자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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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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