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꽃다리 앞에서 아이와

[인천 골목길마실 82] 따뜻한 봄골목 마실

등록 2010.04.24 15:25수정 2010.04.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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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볕을 느끼며 아이하고 마실을 하는 날입니다. 아이는 새벽 여섯 시 조금 지날 때부터 일어나 있었고, 아침에 옆지기가 일산으로 혼자 나들이를 다녀오는 동안 아빠 혼자 아이를 돌보기로 한 날입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기 앞서 이불을 털고 방바닥을 쓸고 닦습니다. 아이한테 꼬마 걸레 하나를 쥐여 스스로 방바닥을 훔치도록 일거리를 줍니다. 그러고 나서 빨래를 하며 아이를 씻기고, 아이가 물놀이를 하는 동안 이불 한 채를 빱니다. 빨래를 모두 마치고 나서 밥을 먹입니다. 아이는 배가 고파야 비로소 밥을 잘 받아먹습니다.

 

밥을 다 먹이니 열한 시 반이 넘습니다. 새벽부터 아이하고 씨름을 한 지 어느덧 여섯 시간째입니다. 아이는 살짝 졸린 눈빛입니다. 잠들까 싶어 포대기를 하고 업어 보는데 잘락 말락 하더니 잠들지 않습니다. 무언가 아쉬운 듯 더 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아이랑 동네 골목마실을 나오면 잠이 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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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고운 햇살을 머금으며 고운 빛깔 뽐내는 골목집이 있습니다. ⓒ 최종규

봄날 고운 햇살을 머금으며 고운 빛깔 뽐내는 골목집이 있습니다. ⓒ 최종규

 

언제나처럼 아이를 데리고 골목마실을 나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아이는 잠들지 않습니다. 더 신이 나서 살아납니다. 잠이 다 깬 듯 보입니다.

 

율목공원 앞에서 뻥튀기를 파는 부부가 낮밥을 들고 있습니다. 지나쳐 가려다가 아이를 불러세워서 삼천 원어치 뻥튀기를 고릅니다. 뻥튀기장수 아주머니가 '아이가 고른 만큼 푸짐한' 뻥튀기 한 봉지를 덤이라면서 건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왼손과 오른손으로 뻥튀기 두 봉지를 와락 움켜쥐며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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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튀기집에서 산 봉지 하나와 덤으로 받은 봉지 하나를 나란히 들고 걷는 아이. ⓒ 최종규

뻥튀기집에서 산 봉지 하나와 덤으로 받은 봉지 하나를 나란히 들고 걷는 아이. ⓒ 최종규

 

따스한 햇살을 느끼면서 아이를 걸리고 아이 손을 잡고 아이를 품에 안고 걷습니다. 아이는 곧잘 걷다가 넘어지다가 품에 안기다가 하면서 아빠하고 동네를 골목골목 누빕니다.

 

이윽고 수수꽃다리 멋스레 자라고 있는 골목집 앞에 섭니다. 수수꽃다리는 꽃봉우리가 활짝 피어 있는 날이 다른 꽃보다 짧아 꽃망울 활짝 터진 날에 맞추어 사진으로 담기에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달 첫머리부터 거의 날마다 수수꽃다리 골목집을 바지런히 찾아오며 오늘은 활짝 피려나 내일은 활짝 피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내일이나 모레쯤 비로소 활짝 피어나겠구나 싶습니다.

 

아이를 수수꽃다리 밑에 세우고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아이한테 "아이 예뻐." 하고 말하며 꽃잎을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말하는 대로 "아이, 예뻐." 하는 말을 따라하면서 저도 꽃잎을 살짝 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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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수수꽃다리 앞에서 아이와 함께. ⓒ 최종규

동네 수수꽃다리 앞에서 아이와 함께. ⓒ 최종규

 

아이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골목집 꽃 구경을 하고 있자니, 수수꽃다리집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옵니다.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합니다. "수수꽃다리가 참 예뻐요." "올해에는 날씨가 이상해서 꽃이 잘 안 펴." "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자네가 꽃 사진 찍으러 찾아오는 그 사람인가 보지? 잠깐만 기다려 봐요."

 

골목집 할아버지는 댁으로 들어가시더니 조금 뒤에 도너츠 하나를 들고 나옵니다. "아이가 이걸 먹나?" 하면서 아이한테 쥐어 줍니다. 아이는 먹을거리 하나 얻었다며 웃음꽃 핀 얼굴로 받아들고는 넙죽넙죽 배꼽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졸린 몸이기에 입으로는 아무 말을 않습니다. 아이는 안 졸릴 때에는 '할아부지'라 말하면서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고맙다고 나타내거든요.

 

집으로 돌아오는 다른 골목길에서도 한창 물이 오르는 봄꽃을 구경합니다. 골목집 할아버지 말마따나 지난날과 견주어 날씨가 아주 뒤숭숭해서 예전처럼 곱고 맑은 봄꽃을 구경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이 걸음새에 맞추어 천천히 걷고 가만히 동네를 돌아보노라면 곳곳에 어여삐 움트며 피어나는 숱한 봄 골목꽃을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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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걷는 골목에서 봄기운을 서로서로 듬뿍 내려받습니다. ⓒ 최종규

아이와 함께 걷는 골목에서 봄기운을 서로서로 듬뿍 내려받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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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4.24 15:25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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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인천골목길 #골목마실 #봄골목 #사진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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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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