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1) 함께살기, 사름벼리

[우리 말에 마음쓰기 914] 내가 아끼는 나한테 고운 말마디

등록 2010.05.14 13:22수정 2010.05.1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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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함께살기

1994년부터 '함께살기'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줄여서 'ㅎㄲㅅㄱ'처럼 적곤 합니다. 어제 은행에 가서 통장갈이를 했더니 은행 일꾼은 'ㅎㄲㅅㄱ'가 아닌 '해서'로 읽더군요. 어떻게 이리 읽을 수 있나 싶은 한편, 사람들이 당신 이름을 적바림하는 자리에 으레 알파벳을 쓸 뿐 한글로 쓰는 일이 드무니 어쩔 수 없구나 싶었습니다. 한글 닿소리로 내 이름을 적바림하는 사람은 아직 몇몇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용케 한글 닿소리 이름을 적바림하고 한글로 내놓는 글이름 하나 마련했습니다. 어릴 적 이웃집에 사는 형이 저한테 옷 하나 선물해 주었는데, 당신이 다니던 서울산업대학교에서 후배들이 만들어 준 옷 앞자락에 "함께 사는 길"이라는 글월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월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이 글월을 줄여 '함께살기'란 이름을 지어 보았고, 열 몇 해째 이 이름을 즐겨쓰고 있습니다. 제가 "함께 사는 길"을 슬기롭게 알차게 이루어 내고 있어 이 이름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모저모 부딪히고 배우면서 차근차근 이루고픈 꿈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좋아하고 아낍니다.


 ㄴ. 옆지기

스물넷 나이에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이때에 '반쪽이'라는 이름이 좋아 즐거이 받아들였습니다. 스물여섯에 새로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무렵에 '사랑이'라는 낱말을 제 나름대로 지어서 써 보았습니다. 스물아홉에 새로운 짝꿍하고 지냈습니다. 이러면서 '고운님'이라는 말마디를 되새겼습니다. 서른셋에 오늘까지 복닥이며 함께 살아가는 지기하고 한 집에서 딸아이를 낳아 살아갑니다. 우리는 서로 '옆지기'라고 일컫습니다. '옆지기'는 제가 지은 낱말이 아니요, 아주 널리 쓰는 낱말은 아니지만, 제법 쓰는 말인 한편, 처음 듣는 분들도 어렵잖이 알아듣습니다. 옆에서 지켜 주는 사람이니 옆지기이고, 옆에서 지내는 사람이니 옆지기이며, 옆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옆지기입니다. 옆지기는 남편일 수 있고 아내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일 수 있고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누나일 수 있고 언니일 수 있으며 동생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가 대수이겠습니까. 어느 자리에 있느냐가 큰일이겠습니까. 사랑이든 믿음이든 나눔이든 저부터 스스로 고개를 숙여 익은 벼다이 살아가려는 매무새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ㄷ. 사름벼리

딸아이 이름은 애 엄마가 지었습니다. 딸아이 이름을 듣는 사람은 으레 애 엄마 아닌 애 아빠가 지은 줄 생각합니다. 낮에 애 엄마가 애 아빠한테 말하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제 글만 읽고 저만 손빨래를 좋아하고 전기를 거의 안 쓰며 살아가는 줄 생각합니다. 정작 애 엄마가 얼마나 손빨래를 좋아하며 전기를 거의 안 쓰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뜻이 맞고 마음이 어울리기에 고단하면서 즐거이 살아가는 줄 생각하지 못합니다. 딸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 애 엄마가 딸아이 이름을 '사름 + 벼리'로 지었습니다. 애 엄마는 '사름'을 성으로 삼고 '벼리'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나라 법으로는 성을 고칠 수 없는 줄 모르고 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애 아빠는 아무 말을 안 했습니다. 법대로 살기란 너무 힘들고, 법을 따로 살필 까닭 없이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적에는 딸아이 이름이 '최 사름벼리'로 오릅니다만, 우리들한테는 그저 '사름벼리'입니다. 우리는 아빠 성과 엄마 성을 아이한테 나란히 붙이지 않습니다. 아빠 성과 엄마 성 모두 아이한테 안 붙입니다.

 ㄹ. 보리술


새벽 일찍 일어난 아이를 네 시 무렵에 가까스로 재운 아빠는 구멍가게에서 사 온 보리술을 한 병 땁니다. 아이는 그냥 아이가 아니라 어른과 똑같은 목숨이고, 어른과 다름없이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어버이 된 사람은 집 안팎 살림을 꾸리며 아이를 보아야 하니 이래저래 눈코 뜰 새 없으며 벅찹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고운 목숨 하나인 까닭에 저랑 제대로 놀아 주지 않으면 골을 부리며 칭얼거립니다. 저랑 놀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끝없이 놀고 다시 놀며 또 놀려 합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 맡에서 나 또한 이 아이만 했을 때에는 어슷비슷하지 않았으랴 생각합니다. 고달픈 몸을 달래고자 보리술 한 잔을 홀짝이며, 이 아이가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 아빠랑 보리술 한 잔을 나누어 마실 무렵 오늘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궁금합니다. 곰곰이 돌이켜보아 줄 수 있으면 고마우나, 찬찬히 되새겨 주지 못한다고 서운하지 않습니다. 그예 오늘 하루 복닥이며 치르는 웃음과 눈물과 주름살과 꾸덕살 모두 보리로 빚은 술잔으로 털고 새 하루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ㅁ. 풀꽃

젊은이는 풀이고 늙은이는 꽃입니다. 온누리가 뒤숭숭하다 보니 늙은 사람을 일컫는 '늙은이'가 깔보는 낱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만, 어려서 어린이요 젊으니 젊은이요 늙었기에 늙은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풋풋합니다. 풋풋하기에 아직 철이 없거나 모자랄 수 있는 한편, 싱그러우면서 산뜻합니다. 늙은 사람은 무르익어 있습니다. 무르익었기에 철이 들었거나 단단할 수 있는 한편, 속이 깊거나 슬기롭습니다. 젊은이는 풀과 같아 풋풋하며 풋내기이기 일쑤이고 풋능금이나 풋고추나 풋감이나 풋김치를 닮습니다. 늙은이는 꽃과 같아 온갖 빛깔로 골고루 아름다우면서 밝고 맑으며 어여쁩니다. 풋풋하던 풀과 풋열매는 바야흐로 무르익습니다. 무르익어 아름답거나 어여쁘던 꽃은 이윽고 지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지는 꽃이란 저무는 목숨입니다. 저물며 젊은이한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새로운 씨앗이 되어 어린이한테 새빛을 선사합니다. 지는 꽃은 아름답고, 돋은 풀잎은 싱싱합니다. 봄은 어린이요 씨앗이라면, 여름은 젊은이요 풋내이고, 가을은 늙은이로서 꽃잎입니다. 고맙게 태어나 즐거이 푸름을 누리다가 기쁘게 꽃을 피워 열매 맺고 잎사귀 떨굽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함께살기 #함께 살아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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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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