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한 산 주름 속 오지였던 괴산에 근래 들어 도로가 닦이면서 사방으로 통하게 되었다. 고을 이름이 그러하듯 괴산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물의 정원'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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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나무 괴산의 ‘괴’는 느티나무槐를 뜻한다. 느티나무는 괴산의 군목이면서 괴산을 가장 잘 드러내는 나무다. ⓒ 김종길
괴산. 이 고장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괴산의 '괴'는 느티나무(槐)를 뜻한다. 옛날 임금이 살던 궁궐을 다른 말로 '괴신', 3정승의 지위를 '괴정'이라 할 만큼 느티나무는 나무 중의 왕이었다. 그만큼 괴산은 그 이름에 걸맞게 산수가 빼어나고 여러 걸출한 인물들이 이곳에서 나서 살았거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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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담계곡 공림사 초입에는 맑은 물과 흰 모래가 절경을 이룬 사담계곡이 있다. ⓒ 김종길
괴산을 가장 잘 드러내는 느티나무를 찾아 길을 떠났다. 관평리의 느티나무를 알은 채 해보고 난 후 공림사로 향했다. 공림사 초입에는 맑은 물과 흰 모래가 절경을 이룬 사담계곡이 있다. 우암 송시열이 쓴 '사담동천'의 붉은 글씨는 아직도 벼랑에 붉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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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담마을 흙집에서 할머니들이 십 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있다. ⓒ 김종길
오래된 흙집에는 마을 할머니들이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무릎 앞에는 십 원짜리 동전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느티나무의 행방을 수소문해보니 마을에 있던 느티나무는 죽은 지 오래되었고 공림사 경내에 있는 느티나무가 인근에서는 제일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으나 고스톱에 방해가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여행자는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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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사 느티나무 수령 천년이 넘었다. ⓒ 김종길
낙영산 아래에 있는 공림사는 신라의 경문왕이 고승 자정선사를 국사에 봉하고 입궐하기를 청했으나 사양하자 그 인물됨에 감동하여 사원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절의 웅장함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불화살을 쏘아 절을 태우려 하였다.
절이 타던 중 불길이 대웅전으로 접근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대웅전과 요사채 1동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이 절에 거주하자 국군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현재 불사가 일어 몇몇 전각들이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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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사 느티나무 높이가 12m에 둘레만 8m에 이른다. ⓒ 김종길
공림사 경내는 대부분의 전각들이 최근에 지어져 옛 맛은 없다. 다만 절을 둘러싼 낙영산의 기암절벽과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절이 유서 깊은 곳임을 말해줄 뿐이다. 특히 수령 천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공림사뿐만 아니라 괴산의 역사를 말해 주는 귀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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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사 느티나무 ⓒ 김종길
느티나무를 보는 순간 그 위용에 놀랐다. 높이가 12m에 둘레만 8m에 이른다. 1982년에 수령 990년으로 지정하였으니 지금은 천년하고도 18년이나 더 산 고목인 셈이다. 오랜 세월 절을 찾는 이들에게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제공해 주었을 이 천년의 느티나무는 아직도 생명력이 넘친다. 어느 가지 하나 상한 곳이 없고 가지마다 싱싱한 연둣빛 잎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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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사 느티나무 수십 명은 족히 둘러앉을 수 있는 넓은 반석임에도 불구하고 느티나무의 위용에 가려 멀리서 보면 작은 바위로 보일 정도로 착각이 든다. ⓒ 김종길
나무 아래에는 너럭바위가 있다. 수십 명은 족히 둘러앉을 수 있는 넓은 반석임에도 불구하고 느티나무의 위용에 가려 멀리서 보면 작은 바위로 보일 정도로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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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림사 느티나무 ⓒ 김종길
아직 날이 무덥지 않아서인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는 이는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그 위용에 놀라 아래위로 훑어보며 지나갈 뿐이었다. 나의 괴산여행은 이곳에서 시작하여 이곳에서 끝이 났다. 덧붙이는 글 | 2010년 5월 15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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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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