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가까이하고 싶은
지구의 의욕이
마침내 산이 되어
여기에 다시 누억만년이 흐르는 동안
무한한 시련을 거득하여 왔으므로
꽃망울이 소리 지르고 터지는 아침...
- 김관식, <산> 일부
산은 마음의 고향일까. 산에 오르면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다. 내가 등산을 시작한 것은 십년이 채 못 된다. 20대 나의 직장 생활은 휴일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과의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었지만, 나만의 시간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지천명을 아는 이 나이를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여여한 마음으로 이 산 저 산을 순례하고 있다.
지난 20일 경남 양산시 소재 천성산 자락의 내원사와 몇 몇 암자를 찾았다. 박두진 시인의 시구처럼 초록이 지쳐 철철 흐르는 듯한 짙루픈 산빛에 가슴의 켜켜이 묻은 때를 씻는 듯 시원했다. 그리고 내원사의 일원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하는 천성산의 하얀 운무에 싸여 나는 잠시 신선이 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천성산은 '제2의 소금강'이라고 불리운다. 이 산의 경치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천성산의 재미있는 전설과 많은 유적들이 아닐까 싶다. 천성산은 산 그 자체가 자연예술문화재. 이런 천성산 내원사 일원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 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성산 지명 유래
초록이 지친 6월의 천성산은 이른 아침의 하얀 운무로 싸여 그 신비감을 더했다. 천성산은 삼국시대 신라문무왕 13(673년)에 원효대사가 참선에 들어 중국 대륙을 바라보다가, 그의 천안에 당나라 태화사라는 절의 1천 대중이 장마로 무너져 내린 흙더미에 묻힌 광경을 목격하고 이에 원효대사는 판자를 던진다.
그 판자가 바다 건너 중국 태화사의 하늘에 떠있는 것을, 법당 안에서 쳐다보게 된 대중들이 놀라 법당 바깥으로 뛰어나오자, 그때 뒷산이 무너져 내린다. 원효가 던진 판자에는 "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읽은 1천명의 대중이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길 청했다.
원효대사는 1천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을 나왔는데, 그 자리가 현재 내원사의 산신각 자리라고 한다. 원효대사는 신선이 사라진 일대에 내원사를 비롯 89암자를 지어 1천명의 제자를 머물게 했다.
그리고 천성산 정상 부근에 큰 북을 달아놓고 북을 쳐 천성산에 머물고 있는 1천명의 제자들을 불러모아 설법을 열고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강론한다. 화엄경을 가르친 자리를 '화엄벌'이라 하며, 북을 친 곳은 '집북봉'이라 불리고 있다.
또 당시 산을 오르던 중생들이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잦자, 원효대사는 산신령을 불러 칡넝쿨을 없앴는데, 오늘날에도 천성산에는 칡넝쿨이 없다고 한다. 그 당시 원효 대사 밑에서 수도한 1천명 제자들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해서 천성산의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천성산 일대에는 내원사를 비롯해 원효가 세웠다는 안적암, 노전암 등 여러 암자가 산재하고 있다. 천성산은 부처님의 품처럼 그 품이 넓다.
정식 산행코스만 해도 무려 9개나 된다. 산길과 산길 사이로 작은 오솔길도 많다. 산길이 많은 천성산. 그래서 산길이 닿는 곳이면 무작정 걸어가 보고 싶은 이 나그네에게 미혹의 손짓과 같다. 약간 헤매다가 다시 길 찾아 걷다가, 이빨 다 드러내고 웃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도 만났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를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 박두진, <청산도>
하얀 운무 속에 잠긴 천성산은 오를수록 몸은 무거운데 마음은 가벼웠다. 태초의 자연을 느끼게 하는 천성산 정말 특이한 소나무들도 많았다. 소나무 세 그루가 한 나무처럼 자라고 있었다. 마치 일가를 이루고 사는 한 식구처럼.
비구니 스님들이 머물고 있는 비경의 내원사
내원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6·25 전쟁시 불탄 것을 1958년 수옥비구니가 재건하였다. 현재 5~6동의 건물이 아담하게 단장되어 있고, 70여명의 비구니가 상주 수도하는 명찰이다.
이 내원사 경내에서 진귀해 보이는 녹슨 가마솥 하나 만났다. 안내판에는 '이 가마솥은 내원사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동국제일선원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많은 눈푸른 납자들이 이곳에 정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녹슨 가마솥 이리 저리 살펴보면서, 어린 시절 내 어머니처럼 기름칠을 해서 닦아 부침개 해서 먹었으면… 하는 나이 답지 않은 생각을 불쑥 해 보았다.
내원사 '금고'는 내원사에 없네...
가마솥 걸린 곁에는 '도 유형문화재 58호 내원사 금고'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금고는 모형이며 진품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통상 불구는 사찰의 행사 때 사용되는 모든 도구를 말한다.
금고는 이러한 불구 가운데 범종, 운판, 목어 등과 함께 소리를 내는 것으로 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반자'라고 부른다. 양쪽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쇠북이라는 뜻에서 금고라고 부른다. 한쪽 면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반자'라고 한다.
내원사의 것은, 한쪽 면만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 가운데 부분에 2중선을 돌려 안과 밖을 구분했다. 안쪽 원에는 꽃문양이 새겨져 있고, 이 금고는 고려 전기의 금속 공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항상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나비처럼 가볍다. 마치 무거운 세상의 짐을 지고와서 산에 다 내려 놓고 돌아가는 듯 말이다. 내원사 내려오는 길에 주막 비슷한 곳이 있어 도토리 묵에 막걸리 몇 잔을 오랜만 산벗 없이 혼자 마셨다.
혼자라도 왠지 혼자가 아닌 듯 마음 가득찬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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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철 흘러 묵은 때 씻어내는 짙푸른 산아, 천성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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