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 간직한 구 조선은행의 발자취

정밀한 복원사업으로 근대사 교육의 장으로 거듭나야

등록 2010.07.05 17:03수정 2010.07.0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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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최근 전경. 찢겨지고 발겨진 모습에서 옛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 조종안


군산시 중앙로 구 경찰서 로터리에서 내항으로 가는 언덕길을 넘으면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구 조선은행 건물 지붕이 보인다. 한때는 노동자들 월급과 회사 어음을 결제하느라 하루에도 수천, 수억의 돈다발이 오갔던 금고 건물이 흉물스럽게 변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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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언론에 공개된 조선은행상량문. 근대 은행역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조종안

다행히 2008년 7월에 국가등록문화재(제374호)로 등록되어 관리되어오다 복원공사 중인 구 조선은행은 1923년에 신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월 상량문과 출근부가 발견되면서 1920년 12월 상량식을 가졌고, 1922년 7월에 완공됐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상량문은 조선은행에 대한 기록화 사업 중 지붕 아래에서 찾았는데, 한식 건축물이 대들보에 상량문을 기록하는 것과 달리, 나무 송판 전면에 '조선은행군산지점상동식'이라 쓰고, 뒷면에는 조선은행 지배인 이름과 시공사, 설계자 등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출근부에는 1908년부터 1925년까지 은행 직원들 출근내용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데, 1권 62장으로 엮여 있으며, 당시 은행 직원들 근무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형식과 미관이 뛰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 아래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건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은행 건물로 사용하다 나이트클럽, 노래방, 가라오케 술집 등으로 찢기고 발겨져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건축 양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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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앞 도로는 ‘본정통’이고, 지금은 사라진 미두장(米豆場) 근처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 조종안


군산지역 근대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자료로 관심 받는 구 조선은행 건물은 건축 양식이 서울에 있는 상업은행 본점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군산세관, 나가사키 18 은행, 미두장(米豆場) 등과 함께 군산의 '본정통'(중심가)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였다.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은 "건물 외관은 전체적으로 서양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수직성이 강조되고 경사지붕으로 처리되어 장중한 느낌을 준다"면서 "외벽은 원래 붉은벽돌 조적조였으나 후에 부분적으로 타일이 붙여졌다"며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정면엔 평 아치가 5개로, 양옆엔 중앙부보다 돌출되어 반원으로 되어 있는데, 측면 앞쪽의 평아치 세 개와 뒤쪽 반원 아치는 꼭 상하층이 연결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만큼 정교하게 지어졌다는 뜻이죠. 창문 주변과 상하층 창문 사이에 시멘트 모르터로 기둥과 인방 형태를 만들어 백색의 뿜칠로 마감하여 붉은 외벽과 대조를 이루게 한 것도 시선을 끕니다.  외벽 중간에는 보 머리를 상징하는 화강석을 끼워 장식했고, 지붕은 우진각 형식으로 함석판 잇기로 마감되어 있는데 물매가 상당히 급합니다. 지붕의 경사면 중간에 고창이 있어 자연채광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건물만의 특징이지요."


이 원장은 설명을 마치고도 못내 아쉬워했다.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학생 및 시민들의 학습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복원공사를 진즉 시작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데려온 자식 쳐다보듯 버려두었다는 것이다.

문화재다운 문화재로 보존해야

전 군산대학교 사학과 천형균(75) 교수는 유서 깊은 건물을 걸레조각처럼 찢겨지고 망가지도록 30년 가까이 방치해온 데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건물을 쌓은 붉은 벽돌들이 대부분 상하지 않고 보존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문화재다운 문화재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천 교수는 "한국에 이만한 수준의 건물을 지을 건축 기술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등이 무너진 것에서 알 수 있듯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온 세월이었으니, 해방 이후 작품 소리를 들을만한 건축물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며 개탄했다.

현재 복원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제강점기 은행건물이라는 눈요기 차원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시각으로 관찰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의 근대 역사를 한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서 건물이 세워지게 된 배경과 은행 업무의 변천 과정을 자료를 통해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신축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시공에 참여했다는 주장은 일치하면서도 설계한 사람이 둘로 나뉘어 유감이었다.    

하나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인질로 잡혀온 독일인들이 설계하고, 중국인 석공들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한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일인(日人)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興資平)가 설계했고, 지붕 공사 때 중국인이 사고로 떨어져 사망한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중국인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시각이어서 전문가들의 세밀한 자료 조사와 연구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조선은행'과 '우리은행' 관계는?

군산시 장미동 23번지에 위치한 구 조선은행은 1903년 11월 설립한 '다이찌은행'(제일은행) 군산 출장소 업무를 1909년 한국은행(대한제국 국책은행)이 인수받았으나 1910년 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바뀌고 1916년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승격된다.

당시 군산에 개점한 7개 은행 중 규모가 가장 컸으며,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는 푸른 지붕을 이고 있는 은행으로 묘사되어, 은행 돈을 유용해 미두와 주색잡기에 빠져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 죽임을 당하는 고태수의 직장으로 등장한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이 현재 영업 중인 어느 시중은행과 연을 맺고 있는지, 뿌리는 어디까지 내렸는지 살펴보았더니 2004년 개성공단에 지점을 개설한 '우리은행'이었다. 해서 '우리은행 군산지점'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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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개성공단 지점 모습(2008년1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남북관계가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 조종안


우리은행은 대한제국 시절(1899년 1월30일)에 황실 자본과 조선 상인이 중심이 되어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대한제국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한천일은행'은 우리나라 최초 은행과 주식회사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한다.

'대한천일은행'은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격인 탁지부대신에게 제출한 창립청원서에 "돈을 원활하게 융통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근본"임을 창립이념으로 삼고,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다"고 명시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외세로부터 은행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정하였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 상권이 피폐화되었던 백동화사태 때에도 일제에 저항하며 휴업을 단행했으며, 1907년부터는 일본에 진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모금액을 관리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는 '대한천일은행'을 '조선상업은행'으로 변경시키는 등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적 애정은 사그라지지 않아 1919년 3·1운동 때에는 본점 앞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조선신탁주식회사'(1932년 설립)와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1936년 설립)도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이북 지역의 51개 영업점을 상실하는 쓰라림을 겪었다. 주로 서민과 소기업금융을 담당했던 두 회사는 해방 후 '한국흥업은행'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1960년에는 우리은행 전신인 '한일은행'으로 탄생하였다.

구 조선은행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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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사진1)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주변. (사진2)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사진3) 한일은행 군산지점. (사진4) 우리은행 군산지점. ⓒ 조종안


구 조선은행은 일제강점기(1922년)에 건물을 신축하여 영업을 해오다 해방 이후 한국은행으로 명칭이 바뀌어 전주로 이전하고, 1950년 6월 '조선중앙무진회사 군산지점'으로 은행업무가 인수된다. 1953년에는 '한국상공은행(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1955년 9월에 '한국흥업은행 군산시점'으로, 1960년 1월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다시 업무가 인수된다.

'한일은행 군산지점'은 1980년 1월 장미동 시대를 마감하고, 중앙로 2가 신축 건물로 이전하여 영업을 해오다 외환위기 시기인 1999년 1월 '상업은행 군산지점'과 점포를 통합하면서 '한빛은행'으로 바꿨다가 2002년 5월 '우리은행 군산지점'으로 거듭나는데, 우리은행은 2004년 12월 분단 이후 은행권 최초로 개성공단에 지점을 개설한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개성공단 지점은 파견 직원 3명과 현지 고용인원 3명 등 6명이 입주 업체와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여·수신 및 송금, 현지 급여 송금 등 업무를 해오고 있다"면서 "지난 봄 천안함 사태 이후 입주기업이 줄면서 여신 업무도 줄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은행 군산지점' 원류는 1940년 11월 群山府 大和町(현 영화동)에 개설했던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 군산지점'이 되겠는데, 1954년 10월에 '한국흥업은행 군산지점'으로, 1960년 1월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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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한국전쟁 수복을 기념해서 촬영한 조선상업은행 군산지점 단체사진. 저고리차림의 여직원은 물론, 실습생으로 추측되는 여고생 모습이 이채롭다. ⓒ 조종안


  
구 상업은행은 1917년 '조선상업은행 군산지점'이란 이름으로 群山府 全州通 34에 점포를 개설하는 것으로 군산과 인연을 맺는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5년 12월 정부지시로 폐쇄되었다가, 1968년 9월 중앙로 2가에 건물을 신축하고 영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1999년 1월 한일은행 군산지점과 통합한다.     

일제 수탈의 상징인 구 조선은행 건물에 입주해서 영업해온 금융기관들의 업무 인수, 통합, 폐쇄, 이전 등 복잡한 역사는, 반세기 가까운 일제 탄압과, 남북분단에 이어 1천만 이산가족을 생산한 한국전쟁, 군사독재자들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불러온 IMF 금융위기 등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럽고 가슴 아팠던 역사를 보는 듯하다.   

구 조선은행 건물은 시민의 애환이 서린 금강을 등에 업고 군산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어, 대할 때마다 반가워야 함에도 그렇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치욕스러운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헐벗고, 굶주리고, 망가진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군산시 관계자는 붕괴된 벽체와 창대석(4개), 장식 석물(대 7개, 소 15개), 건물 내외 창호·창틀 복원(외부 52개, 내부 14개) 등 금회공사를 12월에 마무리하고, 내년 6월까지 조적, 창호, 등 추후공사를 끝내면 새로운 명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100년 가까운 영욕의 세월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알게 모르게 인연의 끝이 닿아 있는 일제 수탈의 상징 '구 조선은행'. 복원작업과 함께 뼈아픈 근대사 교육의 장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귀한 자료를 협조해주신 우리은행 시너지 추진부, 군산시청 관계자 여러분,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 전 군산대 사학과 천형균 교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귀한 자료를 협조해주신 우리은행 시너지 추진부, 군산시청 관계자 여러분,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 전 군산대 사학과 천형균 교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한일은행 #우리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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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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