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천년 은행나무 경내로 가는 '맥문동 길'

군대 간 조카, 팔순 노모와 즐긴 1박 2일 여정... 양평 용문산 절경 그리워

등록 2010.07.12 09:51수정 2010.07.1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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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로 가는 입구 용문사는 천년이 넘은 유서 깊은 고찰이다. ⓒ 김철관


신라 신덕왕 2년(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속된 절로 전통 사찰 47호로 지정돼 있는 절이다. 이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만끽했던 날이 있었다.


지난 3일 모친 84세 생신과 두 달전 군대에 입대해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 조카(김동빈)를 면회하기 위해 경기도 양평을 찾았다. 자식을 군대 보낸 안산에 사는 작은 형 내외와 모친,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맞아 온 아들 한솔이와 딸 단비를 차에 태우고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에 있는 포대를 찾아 조카 김동빈 이등병을 면회하고 외박을 허락받았다.

특히 양평 개군면은 산수유 재배지로 이름을 떨친 곳이었다. 조카를 데리고 와 미리 예약을 해놓은 양평 시내 한 리조트에서 1박 2일을 함께 했다. 리조트에서 모친 84회 생신(음력 5월 22일) 축하 케이크를 자르면서 모친의 만수무강과 조카의 건강한 군대 생활을 함께 빌었다. 첫날은 콘도 내에서 산책과 운동(탁구. 당구), 사진 촬영, 쇼핑, 오락(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보냈다. 특히 이날 저녁, 조명이 요란한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면서 자식들과 사진을 촬영한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특히 늦은 밤까지 자식 입대 후 가슴을 쓰리면서 나날을 보낸 형수님이 조카와 오랜만에 조우해 잔잔한 대화를 어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군대를 보낸 어머니의 심정(모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리조트 창밖을 보니 형수님의 심정을 이해라고 하듯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옆에 누워있는 팔순 노모도 80년대 초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아픔을 참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하루를 보냈다. 새벽이 밝아 산책을 하고 아침 밥을 먹었다. 잠간 휴식을 취하니 벌써 퇴실시간(12시)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타고 온 봉고차 배터리가 방전이 돼 애를 태워야 했다. 더욱이 일요일이라서 망막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개인 택시 운전 경험이 많은 형이 능숙하게 대처, 보험사로 연락을 해 충전을 했고, 간신히 리조트를 떠날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합의해 평소 가고 싶었던 용문산 용문사로 향했다. 가는 길 도중 정확한 날짜가 기억되지 않지만 몇 년 전 가을, 오색 단풍이 물든 아름다운 용문산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당시 노란 단풍을 자랑한 용문사 앞 은행나무가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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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외국인들이 용문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 김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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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용문사로 가는 길 옆 도랑에 흘러 내려온 물줄기를 타고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 ⓒ 김철관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번지에 있는 용문사 입구 주차장은 버스와 승용차로 빼곡히 차있었다. 용문산 등산객들과 용문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주차해 놓고 간 것이었다. 간신히 주차를 했다. 모친과 형, 아들과 딸은 어제 저녁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절 구경을 포기했다. 물론 팔순 노모는 걷기가 불편해 이해를 했다. 하지만 형과 자식들에게 섭섭함이 느껴졌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유명한 사찰인데 관광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해 나와 군대 간 조카, 형수님 등 셋이서 용문사로 향했다. 용문사로 가는 입구는 어느 절 입구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이어졌다. 형수님과 조카는 천천히 대화를 하면서 걸었고, 혼자 빠른 걸음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절로 향했다. 등산객과 용문사를 찾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용문사 입구에서 입장료(어른 기준 2000원)를 받았다. 입구를 지나자 시원한 인공 분수가 용솟음쳤다. 하늘을 찌를 듯 물줄기를 뽐냈다.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는 관광객들도 더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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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싱어 절로 가는 길목에 이동해 씨가 불우이웃을 위해 통기타를 치고 있다. ⓒ 김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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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치기 용문사로 가는 입구에 떡치기를 하고 있는 관광객들. ⓒ 김철관


용문사(www.yongmunsa.org)로 가는 길 주변에는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과 놀이공원, 야외공연장, 야영장, 반딧불이 서식지 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바로 이곳이 용문산관광단지이었다. 용문사로 가는 길 한쪽 옆에는 인공 도랑이 존재했고, 용문사부터 주차장 인근까지 길게 늘어선 도랑에는 쉴 새 없이 물줄기가 이어졌다. 고목도 울창했다. 절로 가는 길을 중심에 두고 다른 한 쪽은 용문산 꼭대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바위와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계곡의 바위를 보니 기암괴석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었다. 흘러 내려온 물줄기를 보니 푸른 파도가 연상됐다.

조금 지나자 등산로 표지판이 보이고 표지판에는 4개의 등산로를 그려 놓았다. 용문사->마당바위->용문산 가섭봉, 용문사->능선길->용문산 가섭봉, 용문사->상원사, 용문사->용문산 가섭봉->백운봉->새수골 등이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등산객들을 보니 4개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 깊은 숨을 몰아 쉬면서 올라 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등산로를 따라 용문산 정상 가섭봉까지 가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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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천년을 넘긴 용문사 은행나무가 우아하게 서 있다. ⓒ 김철관


중간 가게 앞에서는 더덕, 두릅, 고사리, 참나물, 취나물 등 용문산에서 캔 친환경 산나물들을 진열해 놓고, 등산객들을 유혹했다. 바로 옆에는 고전적 방법으로 떡치기를 해 찰떡을 팔았다. 직접 등산객, 관광객들도 떡치기를 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조금 지나자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솔로 가수가 보였다.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통기타 소리와 어우러진 생음악은 등산객들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곳에 잠시 멈춰 손뼉을 치면서 흥을 돋웠다. 바로 '이동해의 아름다운 세상만들기'라는 개인 콘서트였다.

단박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이동해' 씨라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옆 현수막에 써 있는 글귀가 인상적이었다. "작은 정성은 몸이 불편한 장애우와 독거노인을 위해 쓰여집니다. 추우나 더우나 주말마다 홀로 4년 넘게 5시간동안 노래 봉사를 했습니다. '이동해'의 더하기에 모두가 협조해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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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둘레 11미터 은행나무 밑동에서 또다른 나무가 자라고 있다. ⓒ 김철관


잠시 노래를 듣고 발길을 옮기자 곧바로 용문사 정상 가섭봉까지 3.8킬로, 용문사 은행나무까지 0.3킬로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나무였다. 인근 옆 도랑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용문사에서 내 건 현수막에는 '권법, 격투호신술, 병장기 등 산사 무공 템플 연수생 모집'이라는 내용을 보니 어렸을 때 소림사를 무대로 펼쳐진 영화가 생각났다.

등산객들을 따라 다리를 건너자 '맥문동 길'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절로 가는 도중 계속해 '맥문동'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스쳐갔다. 바로 그때 타임을 맞추기나 한듯이 한 스님이 내 옆을 지나갔다. 스님에게 '맥문동'에 대해 물었다.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친절히 답을 해줬다. "백합과의 여러 해살이 외떡잎 식물로 봄과 여름에 꽃을 피우며, 뿌리 줄기는 약용으로 쓴다." 바로 맥문동은 식물이었다. 유추를 해 본 결과 아까 지난 '맥문동 길'은 맥문동이란 식물이 길게 늘어져 있는 길 이라는 의미를 금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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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용문사 대웅전에서 용문산 정상이 보인다. ⓒ 김철관


용문사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앞에 녹음이 우거진 늙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가까이 가 살펴보니 이끼 낀 나무 밑 움푹 패인 곳 주변에는 또다른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은행나무는 대웅전과 일직선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30호, 수령 1100년, 높이 41미터, 둘레 11미터 등에서 알수 있듯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심었다는 설도 있고,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닌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렸다는 설도 있다. 거듭되는 병화와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고 해 신목, 천왕목이라고 불렀다.

조선 세종 때 정3품 당상직첩을 하사 받기도 한 영목이었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불을 태웠으나 이 나무 만이 화를 면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 나고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고 알려지고 있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 알렸다고 한다. 고종이 승하했을 때 큰 가지가 부러지기도 했다. 나라 변고마다 미리 알려주는 영험함이 있는 은행나무였다. 현재 동양에서 유실수로 가장 오래되고 커 외국의 많은 관광객들도 용문사와 함께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를 찾고 있다. 이날도 외국 관광객들이 은행나무를 보려 이곳을 찾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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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화합 소통과 화합을 강조한 현실을 잘 대변한 듯했다. ⓒ 김철관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자 정면에 대웅전이 보였다. 잠시 두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대웅전 경내로 진입했다. 휴일이라서 그런지 경내에는 많은 불자와 관광객들이 모여 소원을 비는 듯했다. 이어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 일주문, 불사리탑, 미륵불, 정지국사 부도 및 비, 부도전 등을 차례로 둘러봤다. 빠르게 둘러보니 목이 말랐다.

대웅전 옆에 있는 약수터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한 바가지 받아 갈증을 해소했다. 지난 초파일 날 사용한 것으로 보인 대웅전 옆 작은 무대에는 '소통과 화합으로 함께 하는 세상'이라고 써 있는 글귀가 정부 4대강 강행 등에 대해 불교계의 입장을 잘 대변한 듯했다. 무대 천정에는 '용문사'라고 쓴 하얀 연등이 줄지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대웅전 밖 정면에 걸린 현수막은 '우란분절(백중) 영가천도 49일 기도(7월 7일부터 8월 24일까지)'를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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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다리 용문사로 가는 길 옆에 흔들 다리가 있다. 바로 밑에서 한 남자가 고독을 즐기고 있다. ⓒ 김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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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등산객 일행이 돌을 쌓아 소원을 빌고 있다. ⓒ 김철관


어쨌든 국가 전통사찰 47호로 지정된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일설에서는 경순왕(927~935년)이 친히 행차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창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348년 고려 우왕(4년)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 했고, 조선 태조 4년(1395년) 조안 화상이 중창했다. 세종 29년(1447년)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년) 왕명으로 중수했다.

성종 11년(1480년) 처안 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년) 봉성대사가 중창했으나 순종 원년(1907년)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 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 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 중건했다. 1982년 선걸 스님이 주지로 취임해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 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 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했다. 경내에는 권근이 비문을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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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여가 용문산 계곡에서 여가를 보내고 잇는 사람들. ⓒ 김철관


절 구경에 심취된 나에게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는 노모와 자식들이 연방 전화를 했다. 배가 고프다고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좀 더 절에 머물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생각을 바꾸었다. 절을 내려오면서 계곡을 보니 구석구석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돌을 쌓아 소원을 비는 등산객들도 엿보였다. 등산객들이 지나가는 흔들 다리 밑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면서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돋보였다.

내려오는 도중 용문산의 여기 저기 좋은 광경들을 사진에 담았다. 용문산은 예로부터 계곡이 깊고 험준하며, 고목이 울창해 자연의 신비함을 뽐내고 있는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곳에와 천년이 넘은 고찰 용문사와 상원사가 있다라는 사실을 알았다.

절에서 하산해 가족들과 봉고차를 타고 양평시내로 나가 오후 2시 30분쯤 점심 식사를 했다. 조카 귀대 시간이 다 돼 어제 면회 왔던 그길을 따라 개군면으로 향했다. 부대 주변 동네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가족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리고 곧바로 조카를 부대로 보냈다. 부대 정문에 들어서 손짓을 하는 이등병 조카를 보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무리 민주화된 군대라고 하지만 갇혀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는 아픔이 마음을 울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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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사진 조카가 귀대하기 전 부대 옆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김철관


아들을 부대로 보내고 봉고차를 끌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형님과 형수님은 차 안에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숙연하게 앉아 있었다. 아들을 다시 부대로 돌려 보내야 하는 마음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모친 84회 생일과 이등병 조카 외박으로 시작된 1박 2일의 일정은 이렇게 지나갔다.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한 것은 용문사와 은행나무 관람이었다.
#용문사 #용문사 #용문사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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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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