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쓴 겹말 손질 (92) 슬기와 지혜

[우리 말에 마음쓰기 940] '분명'과 '확실'과 '틀림없이' 사이에서

등록 2010.07.14 16:29수정 2010.07.1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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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슬기와 지혜

.. 그런 면에서 '머드 세일'은 이념과 종교가 다르고 사과와 관습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슬기와 지혜가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뜻깊은 행사가 아닐까 ..  <임세근-단순하고 소박한 삶, 아미쉬로부터 배운다>(리수,2009) 145쪽


"그런 면(面)에서"는 "그런 테두리에서"나 "그래서"나 "그렇기 때문에"로 다듬고, "이념(理念)과 종교(宗敎)가"는 그대로 두어도 되며 "생각과 믿음이"로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념'이나 '종교' 같은 낱말은 굳이 다듬을 까닭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쓸 때가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다만, 글흐름에 따라서 살며시 다듬어 낼 수 있습니다.

"사과(謝過)와 관습(慣習)이" 또한 그대로 두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는 "뉘우침과 버릇이"나 "뉘우침과 삶이"로 손볼 수 있습니다. '인간(人間)'은 '사람'으로 손질하고, '행사(行事)'는 '자리'로 손질해 줍니다.

 ┌ 지혜(智慧/知慧) :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   - 삶의 지혜 / 지혜를 짜다 /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가 담겨 있다
 ├ 슬기 :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내는 재능
 │
 ├ 슬기와 지혜가
 │→ 슬기가
 │→ 슬기와 재주가
 └ …

국어사전에서 토박이말 '슬기'를 찾아보면 "사리(事理)를 바르게 판단(判斷)하고"로 풀이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한자말 '지혜'를 찾아보면 "사물의 이치를 빠르게 깨닫고" 같은 풀이말이 달려 있습니다. '사리'란 바로 "사물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판단'이란 다름아닌 "옳게 깨닫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국어사전은 '슬기'와 '지혜'를 풀이하면서 '다른 낱말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곰곰이 따져 보면 하나는 토박이말이요 하나는 한자말인데, 서로 사뭇 다른 낱말인 듯 잘못 바라보도록 풀이말을 달고 있는 노릇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과 "잘 처리해 내는 능력"이라는 대목도 매한가지입니다. 어차피 같은 뜻이요 같은 말이지만, 꾸밈없이 풀이말을 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부터 익히 써 온 말은 '슬기'이고, 이를 한자로 옮겨적을 때 '지혜'였으나, 우리 국어사전은 이러한 말흐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이 보기글처럼 "슬기와 지혜가"처럼 글을 쓰고야 맙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사람과 인간이"라 말하는 꼴이며, "돈과 비용이"라 말하는 꼴이고, "길과 도로가"라 말하는 꼴입니다. "집과 가옥이"라 말하는 꼴이며, "밥과 식사가"라 말하는 꼴이고, "가락과 멜로디가"라 말하는 꼴입니다.


 ┌ 삶의 지혜 → 살아가는 슬기 / 삶슬기
 ├ 지혜를 짜다 → 슬기를 짜다 / 좋은 생각을 짜다
 └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가 → 조상들 넋과 슬기가 / 조상들 마음과 슬기가

아무래도 우리한테는 슬기가 없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우리한테는 고운 마음을 키우는 매무새가 얕은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우리한테는 문화와 예술과 과학과 교육과 사회를 북돋우는 넋이 모자란지 모릅니다.

슬기로운 말과 슬기로운 생각과 슬기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지 않는지 모릅니다. 슬기를 나누고 슬기를 펼치며 슬기를 갈고닦고자 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슬기를 사랑하고 슬기를 믿으며 슬기를 어깨동무하고 싶지 않은지 모릅니다.

ㄴ. 분명 틀림없으나

.. 지폐 위에 찍혀 있는 이 퇴계는 분명 훌륭한 인물임에 틀림없으나, 중국 주자학을 몇 세기 뒤에 전달해 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  <시바 료타로/박이엽 옮김-탐라 기행>(학고재,1998) 187쪽

"지폐(紙幣) 위에"는 "종이돈에"로 손보고, '인물(人物)'은 '사람'으로 손봅니다. 보기글을 보면 앞쪽에서는 '인물'이라고 적었으나 뒤쪽에서는 '사람'으로 적었군요. '전달(傳達)해 준'은 '이어 준'이나 '옮겨 준'으로 손질합니다.

 ┌ 분명(分明) : 틀림없이 확실하게
 │   - 전구에는 분명 불이 들어와 있지 않은데
 │
 ├ 분명 훌륭한 인물임에 틀림없으나
 │→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나
 │→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으나
 └ …

말 그대로 틀림없이 '분명'은 '틀림없이'를 뜻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분명'이라는 한자말이 "틀림없이 확실하게"를 가리킨다고 나오는데, '확실(確實)하다'를 다시금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틀림없이 그러하다"를 가리킨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확실하게"란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러하다"라는 이야기요, 우리 국어사전은 낱말풀이를 엉터리로 달아 놓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엉터리 말풀이를 알아채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국어사전을 차근차근 찾아보면서 내가 쓰는 말이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지를 헤아리는 사람이 몹시 적기 때문입니다. 지난날부터 우리가 어떤 말을 어느 자리에 써 왔는가를 곰곰이 되씹으며 옳고 바르게 말을 익히려고 하는 사람 또한 대단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말풀이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자말 '분명'과 '확실하다'가 모두 '틀림없이-틀림없다'를 가리킨다면, 이 같은 한자말은 우리가 구태여 쓸 까닭이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쓰고픈 분들은 그대로 쓰되, 이 같은 한자말이 우리 삶자리에 스며든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틀림없이'라고 적어 넣어야 할 자리에 이 한자말이 끼어든 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네 국어사전에 '분명'과 '확실히'를 올림말로 실어 놓고자 한다면, 말풀이는 알맞게 고쳐 놓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 분명 : '틀림없이'로 고쳐쓸 낱말
 └ 확실하다 : '틀림없다'로 고쳐쓸 낱말

그리 알맞지 않은 낱말일지라도 사람들이 두루 쓴다면 이제는 우리 말로 자리잡았다고 여겨야 합니다. 썩 올바르지 않은 말투일지라도 사람들이 자주 쓴다면 이제는 우리 말투로 뿌리내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두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말과 넋과 삶을 돌아보면서 내 말과 넋과 삶이 대충대충 흘러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냥저냥 아무렇게나 자리잡거나 뿌리내리려는 얄궂은 낱말과 말투를 거스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잘못된 법을 고치려 애쓰듯 잘못 자리잡는 낱말을 고치려 힘쓰고 엉터리로 뿌리내리려는 말투를 고치려 마음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바로 우리 삶이니까요. 바로 우리 넋이니까요. 바로 우리 말이니까요. 바로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 삶이니까요. 바로 우리 애틋한 사람들 넋이니까요. 바로 우리 따스한 사람들 말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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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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