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412)

― '순백의 설경', '순백의 눈' 다듬기

등록 2010.07.13 11:17수정 2010.07.1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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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순백의 설경

.. 쉬엄쉬엄 마애불까지 오르는 동안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순백의 설경에 말을 잊었다 ..  <현진-삭발하는 날>(호미,2001) 124쪽


'설경(雪景)'은 '눈 모습'이나 "눈이 내린 모습"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또는 '눈밭'이나 '눈나라'나 '눈누리'나 '눈벌'이나 '눈벌판'이나 '눈판'으로 다듬어 봅니다.

 ┌ 순백(純白/醇白)
 │  (1) = 순백색
 │   - 순백의 실크 / 순백의 옷
 │  (2) 티 없이 맑고 깨끗함
 │   - 순백의 마음 / 순백의 눈동자
 ├ 순백색(純白色) : 다른 색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흰색
 │
 ├ 순백의 설경에
 │→ 새하얀 눈 모습에
 │→ 새하얗게 눈내린 모습에
 │→ 눈으로 하얗디하얗게 된 모습에
 │→ 하얗게 내린 눈을 보며
 └ …

국어사전에 나오는 한자말 '순백'을 찾아보니 이 한자말은 '순백' 꼴로만 쓰는 일이 드물구나 싶습니다. 꼭 뒤에 토씨 '-의'를 붙이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순백 실크-순백 옷-순백 마음-순백 눈동자"처럼 적으면 어딘가 허전해요. 어쩐지 어설픕니다. 똑같은 한자말 '순백색'일 때에는 "순백색 실크-순백색 옷-순백색 마음-순백색 눈동자"처럼 적는 말마디가 허전하거나 어설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자말 '순백색'을 놓고도 "순백색의 실크"나 "순백색의 마음"처럼 이야기하기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한자말 '순백'까지 다듬어 "하얀 비단"이나 "새하얀 비단"으로 적거나, "하얗디하얀 옷"처럼 적어 봅니다. "해맑은 마음"이나 "티없는 눈동자"처럼도 적어 봅니다. 겨울날 내리는 눈이라면 "하얀 눈"이나 "새하얀 눈"이나 "하얗디하얀 눈"이라고 적을 수 있습니다.

 ┌ 순백의 실크 → 하얀 비단 / 새하얀 비단
 └ 순백의 옷 → 하얀 옷 / 새하얀 옷


그런데 사람들은 옳고 바르게 가눌 우리 말을 제대로 모르지 않나 싶습니다. '희다'와 '하얗다'가 어떻게 다른지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희다' 말뜻은 "눈 빛깔과 같이 밝고 또렷하다"이고, '하얗다' 말뜻은 "깨끗한 눈이나 밀가루와 같이 밝고 또렷하다"임을 살피지 않습니다. 여느 빛깔이 '희다'이고 한결 밝고 또렷한 빛깔이 '하얗다'입니다. '흰빛'과 '하얀빛'은 같은 빛깔이면서 느낌과 세기가 사뭇 다릅니다.

'하얗다' 말뜻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하얀 비단-하얀 옷-하얀 눈"이라고 적바림하는 글줄로 넉넉합니다. 느낌을 살짝 달리하고 싶을 때에는 '새하얀'과 '하얗디하얀'을 알맞게 넣으면 됩니다. '맑은'과 '해맑은'과 '티없는'과 '맑디맑은'을 알뜰살뜰 넣을 수 있고, '싱그러운'이나 '싱싱한'이나 '푸른'을 넣어 볼 수 있습니다.

 ┌ 순백의 마음 → 맑은 마음 / 해맑은 마음
 └ 순백의 눈동자 → 맑은 눈동자 / 티없는 눈동자

쓰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말하기 나름이며 곱씹기 나름입니다. 옳고 바르게 쓰려는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우리 마음을 해맑게 가누면서 우리 넋과 얼을 환하게 빛낼 수 있습니다. 알차고 다부지게 말하려는 매무새라면 언제라도 우리 생각을 티없이 가꾸면서 우리 뜻과 꿈을 사랑스레 뽐낼 수 있습니다.

ㄴ. 순백의 눈

.. 그리고 12월 5일, 나는 올겨울 들어 첫눈을 보았읍니다. 순백의 눈을 보고 아사히가와에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읍니다 ..  <미우라 아야코/박기동 옮김-여인의 사연들>(부림출판사,1984) 92쪽

"돌아왔다는 것을"은 "돌아왔음을"이나 "돌아왔구나 하고"로 다듬어 봅니다.

 ┌ 순백의 눈을 보고
 │
 │→ 하얀 눈을 보고
 │→ 하얗디하얀 눈을 보고
 │→ 새하얀 눈을 보고
 └ …

해가 갈수록 눈이 드뭅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눈 구경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솔솔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기에도 힘들지만, 어렵사리 맞이한 눈을 여러 날 두고두고 바라보기에도 힘듭니다. 이제 우리 터전에서 눈은 조금도 반가운 손님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눈은 하나도 기쁜 동무가 아닙니다. 귀찮거나 번거로울 뿐이요, 짜증스럽거나 고단할 뿐입니다.

쏟아진 큰 눈을 옴팡 뒤집어쓰면서 골목마실을 할 때에 저는 강아지라도 된 듯 쉴새없이 걷고 뛰고 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온누리를 새햐앟게 덮은 눈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이 눈 느낌을 오래오래 간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큰 눈을 눈 그대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길에 차가 다니기 힘들다며 염화칼슘을 뿌리고 쓸고 퍼내는 사람만 만났습니다. 사람 다닐 길조차 사라지도록 퍼붓는 눈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을 텐데, 눈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나 푸름이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예 홀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쏟아붓듯 내리는 이 눈을 쳐다보면서 '하얀 눈이네' 하고 외칠 수 있는 사람 또한 사라지고 있지 않느냐고. '지겨운 눈이야' 하고 외치는 사람만 나타나지 않느냐고.

 ┌ 흰눈 / 흰꽃 / 흰빛 / 흰밥
 └ 하얀눈 / 하얀꽃 / 하얀빛 / 하얀밥

송이송이 내리는 눈은 처음에는 도시이고 시골이고 하얗게 덮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잿빛이 섞이며 질퍽질퍽하고 맙니다. 고운 결 하얗디하얀 눈이 아니라 미운 결 지저분하디지저분한 눈입니다. 눈구름 걷힌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는 눈더미, 눈사람, 눈길, 눈밭이 아닌 구지레한 얼음덩어리입니다.

흰눈이고 하얀눈이고 우리 스스로 내버리면서 흰마음이고 하얀마음이고 함께 내버립니다. 흰꽃이며 하얀꽃이며 우리 터전에서 밀려나고 쫓겨나면서 흰사랑이며 하얀사랑이며 나란히 밀려나거나 쫓겨납니다.

넉넉히 돌아보는 삶이 아니면서 넉넉히 곱씹는 생각이 아닙니다. 넉넉히 곱씹지 못하는 생각이니 넉넉히 보듬지 못하는 말입니다. 넉넉히 가다듬지 못하는 말이고, 넉넉히 갈고 닦지 못하는 글입니다. 눈도 비도 구름도 무지개도 바람도 물도 흙도 햇볕도 모두 싱그러움과 푸름과 하이얌을 잃습니다. 사람도 삶도 터전도 마을도 싱그러움과 푸름과 하이얌을 함께 잃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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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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