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방송·서치라이트..."경찰·대림산업 고문, 도 넘었다"

이포보 농성 26일째... 4대강 범대위, 긴급구제 기각한 인권위 규탄

등록 2010.08.16 21:23수정 2010.08.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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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시계태엽오렌지>의 한 장면. 주인공 알렉스가 '루드비코' 치료를 받고 있다. ⓒ 화면 갈무리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71년 영화 <시계태엽오렌지>에서는 국가가 범죄자를 세뇌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극한의 폭력을 경험하면 그 반발작용으로 선하게 된다는 일명 '루드비코' 치료법을 시행하는 것.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강간하고 노인을 살해하는 등 각종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수감 중인 알렉스. 그는 눈꺼풀을 고정시키는 기계에 묶여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 교향곡을 들으며 잔인한 범죄의 장면을 끝없이 반복해서 봐야 했다. 눈을 감을 수 없는 그는 꼬박 이틀 동안 잠을 잘 수 없었고 똑같이 반복되는 음악과 장면에 결국 세뇌되고야 만다.

알렉스는 베토벤 교향곡만 들어도 구토를 하게 되고, 모든 폭력과 악행 등 범죄에 대해 조건반사식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존엄성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선한 국민'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국가의 모습을 조롱한다.

최근 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가 인권을 무시하고 사람을 세뇌시키는데 사용한 '잠 안 재우고 똑같은 내용 반복해 보여(들려)주기 방법'이 경기도 여주군 이포보에서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세 명의 환경운동가들에게 재연됐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농성자들... 불빛과 소음에 고통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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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보 농성장과 30여m 떨어진 곳에 두 대의 서치라이트가 설치 됐다. ⓒ 환경운동연합


이포보 농성현장의 경찰은 우선 영화에서처럼 농성자들이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농성 7일차에 접어든 지난달 28일, 경찰은 농성장과 20여m 떨어진 보 상판 위에 서치라이트 두 대를 설치했다.(관련기사 : 농성장 감시용 서치라이트 설치... "불 꺼라")

강한 서치라이트의 불빛은 밤새 농성자장을 비췄고, 이로 인해 농성자들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농성자 가운데 한 명인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러한 현장 상황을 전달했다.


"경찰과 대림산업의 자극과 충동질이 집요합니다. 서치라이트를 켜 잠을 못 자게 하더니 우리가 반응을 보이자 이제는 대낮에까지 불을 켭니다. 녹색성장을 주장하는 나라에서 에너지를 낭비하는 졸렬한 자학적 퍼포먼스에 조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염형철 처장 트위터(@yumdolsoi) 9일 오후 5시 49분

경찰은 며칠 후 서치라이트와 함께 사이렌과 경고방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밤새 강한 불빛으로 잠 못 들게 하면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내며 "그곳은 위험하다", "내려와라, 내려오지 않으면 진압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행동은 범죄다"라는 식의 경고방송을 하는 것이다.

농성자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외부와 고립된 상태로 농성이 한 달 가까이 진행되면서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경찰의 조치는 심각한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염형철 처장은 경찰의 행위를 '고문'이라 표현하며 그 고통을 토로했다.

"고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야만상태로 몰고 간다. 이포바벨탑에서는 수면을 방해하기 위해 새벽 0시, 3시, 5시에 요란한 사이렌과 경고방송이 이뤄진다. 서치라이트는 밤새 켜있고 경찰은 철근을 끌며 시위하기도 한다. 경찰과 대림산업의 고문이 도를 넘었다. 이게 4대강 사업의 본질인가 싶다." - @yumdolsoi 11일 오전 11시 23분

앞선 글과 이틀 간격으로 올라온 글이지만 차이가 느껴진다. 농성자들의 정신적 피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식량도 제한적... 연일 불안감 호소하는 농성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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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시공사측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포보 농성자들. 왼쪽부터 장동빈 수원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박평수 고양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 ⓒ 최지용


잠을 못 자게 하는 불빛과 반복되는 소음과 방송, 농성자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경찰은 농성자들이 가지고 올라간 식량과 물이 떨어지자 인도적 차원으로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물을 제공하기로 했고, 지난 5일부터 매일 1Kg의 선식(곡물을 갈아 물에 타 마시는 것)과 한 사람당 1리터의 물, 그리고 약간의 소금을 농성장에 올려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열량과 1리터의 물은 성인남성의 일일 권장량에 한참 못 미친다. 단식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1kg, 열량 4075kcal... 우리의 주식인 선식의 3일치 무게와 열량입니다. 한 명이 하루에 453kcal을 섭취한다는 뜻인데, 권장 열량인 2700kcal의 1/6쯤 되네요. 지금까지 활동에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수치를 보니 왠지 불안합니다." - @yumdolsoi 7일 오후 3시 57분

연일 불안감을 호소하는 농성자들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환경단체는 지난 10일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조치'를 신청했다. 인권위가 경찰에게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고 잠을 방해하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권고 조치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그러나 인권위는 지난 13일 "물, 식량이 일부 반입되고 있어 요건에 해당되지 않아 긴급구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환경단체의 '긴급구제조치' 요청을 기각했다. 인권위는 "고공농성자들에 대한 생명, 건강 또는 신체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등 인권보호에 만전을 기하도록 경찰에 요청"하는 정도로 조치를 마무리했다. 경찰의 서치라이트 불빛이나 소음, 경고 방송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었다.

"국가 인권위가 아니라 경찰청 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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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4대강 범대위와 인권단체가 긴급구제조치를 기각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앞에서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최지용


이에 4대강사업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와 인권단체연석회의는 16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긴급구제 기각에 대해 항의하고 실효성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서한을 인권위에 전달했다.

지영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인권위를 믿고 긴급구제를 요청했는데 물과 선식이 올라간다는 이유만으로 기각해 버렸다"라며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지 대표는 이어 "농성자들은 기초대사량에도 못 미치는 식사를 하며 20여일을 보내고 있다"라며 "공권력에 의해 강요된 단식상태"라고 토로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서한 전달을 위해 인권위 사무총장실을 찾았지만 손심길 사무총장 대신 최재경 조사총괄과 과장이 이들을 맞이했다.

최 과장은 긴급구제 요청을 기각한 이유에 대해 "이포보에 올라가 세 명의 농성자를 만났는데 모두 건강해 보였다"라며 "시공사에서 제공하는 물품은 부족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 과장은 경찰의 서치라이트와 경고방송에 대해서도 "밤에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수면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인권위의 태도에 대해 환경단체 한 관계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니라 경찰청 인권센터"라고 비난하며 "건강해 보인다는 게 기각 사유라니, 그럼 쓰러져 죽어가야 조치한단 것이냐"라고 성토했다. 그는 이어 "인권 감수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인권위를 규탄하며 이포보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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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범대위 "피골이 상접해야 인권위 움직이나" ⓒ 최인성


농성자들의 마지막 메시지... "어깨가 무겁다"

16일 현재 이포보 농성장에는 한동안 제공되던 무전기의 베터리가 지급되지 않아 5일째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경찰은 농성장에서 약 50여 m 떨어진 상판 위에 텐트를 치고 농성자들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이제 농성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경찰과 시공사 측뿐이다. 심각한 임권침해 상황이 발생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농성자들이 마지막으로 외부에 소식을 알린 것은 지난 11일, 함께 농성에 돌입했던 경남 함안보의 농성자들이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함안 활동가들이 20일 활동을 끝으로 내려왔습니다. 태풍을 앞두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지키려했다 들었으나 많은 분들의 설득 속에 눈물을 머금고 내려온 모양입니다. 활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건강회복에 전념하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만 남았고 함안의 몫까지 짊어지게 됐습니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 @yumdolsoi 11일 오전 11시 29분
#4대강 #이포보 #영화 #환경운동연합 #스텐리큐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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