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끼바리를 심으면 안되는 건데?

[아이들과 함께 읽는 책 52] 제6회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 수상작 <매>

등록 2010.09.14 11:49수정 2010.09.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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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매> 겉그림

<매> 겉그림 ⓒ 우리교육

<매> 겉그림 ⓒ 우리교육

화자인 나(정희)에게는 8살 터울의 오빠(정하)와 개구쟁이 남동생 범이가 있다. <매>(우리교육 펴냄)는 오빠가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합격, 동네잔치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해 봄, 초등학교 2학년생인 코흘리개 범이가 어느 날 마을 인근의 산 왕자봉에서 노란 아기새 두 마리를 가져오게 된다. 범이는 이 새가 꾀꼬리인줄 알고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새는 어느 날 보드랍고 예쁜 노란 털이 숭숭 빠지기 시작하더니 검은색인 섞인 거친 털로 털갈이를 하고 만다. 알고 보니 꾀꼬리가 아니라 '매'였던 것. 개구리를 잡아다 먹이는 등 범이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매'는 무럭무럭 자란다.

 

"이, 이런 베를 밟고도 무사헐 거 같아요?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쌀을 짓밟는 사람덜이 어딨어요. 당신들은 촌사람 아니여? 밥 안 먹구 살어? 죄 받을 짓 허지 말라구!" 정식이 오빠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빨개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우리도 어쩔 수 읎다잖아. 위에서 시키는 걸 으째?" 논두렁에 서 있던 우리 아버지가 논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킨다고 다 자란 베를 밟어? 이런 법이 어딨나?" 그러자 그 사람은 아버지 팔을 뿌리쳤다.

 

"그러게 누가 아끼바레를 심으래? 새마을 운동도 몰러? 수확량이 많은 통일베 심으라고 그렇게 교육을 했는데도 안 심는 이유가 뭐요? 이런 게 다 누굴 이롭게 허는 건줄 알어? 다 북한 김일성이 좋은 일이라구" - 책 속에서

 

작품의 배경은 경기도 화성 부근 어떤 농촌 마을이고, 시대적 배경은 농촌진흥청이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여러 차례 연구한 결과 개발한 통일벼를 농가에 막 보급하기 시작하던 그 무렵 어느 해이다.

 

통일벼가 보급되기 전, 국내 농가들은 속칭 '아끼바리'라는 일본 벼 품종을 재배하고 있었다. 이 벼는 밥맛은 찰지나 수확량이 적었고, 키가 커서 볏짚을 사료로 쓰기에 좋았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통일벼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았으나 아끼바리에 비해 밥맛이 별로 좋지 않았다. 또 키가 작은지라 볏짚도 아끼바리보다 쓸모없었다. 때문에 정부와 농촌진흥청이 재배를 적극권장해도 기피하는 농가들이 많았다.

 

공출할 것은 통일벼, 집에서 먹을 것은 아끼바리를 심는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이처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부사이에 옥신각신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70년대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통일벼와 아끼바리를 둘러싸고 말이 많았던 그 시절을 기억하리라.

 

모내기한 벼가 자리를 잡아 한창 자라기 시작할 즈음, 팔촌이면서 오빠와 남다르게 친한 친구인 정식이 오빠가 아끼바리를 심었다는 것이 발각된다. 그러자 면사무소 직원들이 몰려와 정식이 오빠의 벼들을 마구 밟아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아버지와 동네사람들이 "이번만 봐주면 내년에는 꼭 통일벼를 심게 하겠다"고 호소하지만, 그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벼를 짓밟아 버린다. 이에 분노한 정식이 오빠가 논두렁에 꽂혀있던 삽을 면서기의 어깨에 내리쳐 상처를 내고 만다. 이 일로 정식 오빠는 구속된다.

 

얼마 후 여름방학이 되고 오빠가 서울에서 내려온다. 오빠는 매를 애지중지하는 어린 동생들에게 "매는 아무리 길들여도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다"며 매를 날려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버지도 몇 번이나 날려 보내자고 하지만 범이는 꿈쩍 않는다.

 

"수출이 늘어나고, 국민소득이 높아졌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 현실은 비참합니다. 당장 제가 나고 자란 농촌을 보십시오. 농촌을 잘 살게 해준다는 말에 정부에서 심으라는 벼를 심고,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낮은 월급을 주고도 당장 쌀값을 치르게 하려는 얄팍한 계획이었습니다. 쌀값이 떨어지자, 헐값에 쌀을 판 농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빚을 져야 합니다.

 

품질 좋은 벼농사를 짓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올봄에는 통일벼를 심지 않았다고 다 자란 모를 밟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묵묵히 농사만 짓던 제 친구는 거기에 항의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농부의 아들딸들은 돈 없어 못 배운 채로 도사로 가 공장 노동자가 되지만 낮은 월급 때문에 그 생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원하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청년들이 꿈을 꿀 수 없고,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경제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 책 속에서

 

여름 어느 날,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가 된다. 서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려니, 어서 빨리 공부를 마치고 판사가 되어 집과 고향마을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다는 근동의 희망인 오빠가 데모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기 때문에. 오빠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억압의 시대, 아무리 길들이려고 해도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매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지난날 억압과 싸워 자유를 찾았던 사람들과 그런 시대가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편안함과 타성에 길들여지는 위험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청소년인 내 아이들에게 '이런 시절도 있었노라!' 알게 하고자 이 책을 읽게 했더니 묻는다. "왜 자기 맘에 드는 벼를 심을 수 없어? 정말 우리나라가 그랬어? 그럼 우리나라가 공산국가였었나?"라고. 이런 아이들에게 내 기억 속 통일벼에 대해 알려줬다.

 

"좋은 그림 앞에서 붓놀림의 힘을 느끼며 전율할 때가 있듯이, 작품을 읽는 내내 묵직한 글발의 힘이 나를 붙들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억압의 시대에 대항하여 자유를 획득하려는  상징성을, 가두어 놓은 매를 풀어주는 것으로 드러낸 탄탄한 작품이다."

- 심사위원 송언(어린이책 작가, 중광초등학교 교사)

 

<매>는 제6회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 창작부문 대상 수상작(2010년)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언뜻 한 소년이 매를 통해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에 눈뜨는 그런 책이려니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훨씬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부끄러운 과거지만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들춰내고 제대로 알아야 하는 그런.

 

덧붙이자면, 아이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시대 배경 같다. 어린이들 몇이나 통일벼에 대해 알까? (내가 알기로는) 이제까지 동화로 그다지 많이 다뤄지지 않은 시대인 것 같다. 그러니 작품 이해를 위해 어른들이 좀 설명해줘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시절이지만 말이다.

 

판사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유지들의 돈을 모아 내미는 면장님, 무지렁이라고 깔보고 농사를 무시하는 공무원들, 아버지가 해마다 지게 한가득 가져다주는 수박을 바라는 선생님들, 힘을 모아야 하는 일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삭빠르게 빠져나가는 사람들, 뒷말하는 집안 어른….

 

책을 통해 만난 이 풍경들은 한편으론 내게 불쾌하고 찝찝하게 남아 이따금씩 떠오르기도 하는 유년시절의 추억인지라, 이 책이 다소 씁쓸하게도 읽혔다. 책을 읽는 내내 통일벼와 아끼바리를 놓고 실랑이를 하던 어른들 생각도 났다. 여하간 이 책은 우리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할 우리의 부끄러운 지난날을 알려주기에 딱 좋은 동화 같다.

덧붙이는 글 제6회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 수상작 <매>| 지은이:이창숙| 우리교육 2010.9.9| 값:8500원

이창숙 지음, 김호민 그림,
우리교육, 2010


#매(새) #우리교육 #어린이책 작가상 #통일벼 #아끼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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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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