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던 남편님, 명절땐 예외인감?

[명절, 부부의 동상이몽] 본가에만 가면 봉건주의로 회귀하는 남편

등록 2010.09.21 20:15수정 2010.09.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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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앞둔 20일 오전 서울역에서 한 가족이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탑승하고 있다.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앞둔 20일 오전 서울역에서 한 가족이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탑승하고 있다. ⓒ 유성호


명절 준비? 난 한 달 전부터 한다. 연애 시절 남편이 눈 오는 설 연휴에 고속버스 타고 28시간 만에 집에 내려가는 걸 보고 나서 결혼 후에는 명절 때 꼭 기차를 타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기차타기가 만만찮다. 워낙 경쟁률이 높아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열심히 '클릭질'... 기차표를 예매하라!

우선 예매 날짜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올해도 철도공사에서 온 메일을 확인 못해 깜박할 뻔했다. 한 달 전, 전철역에 길게 늘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뭐야?' 생각했다가 '맞아. 추석!'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가 타는 호남선은 항상 경부선 다음날 예매해서 다행스럽다.

이때부터 남편의 '명절 태클'이 들어온다. 명절 차표의 온라인 예매 시작은 새벽 6시. 5시 30분부터는 준비가 필요하다. 집에 있는 모든 컴퓨터(데스크톱 한 대, 노트북 한 대)를 철도공사 홈페이지에 로그인 해놓은 채 내려가고 올라올 기차시간을 확인해 둬야 한다. 아침잠 많은 남편,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난다. 발로 차도 꿈쩍을 안 한다.

결혼 후 6번의 명절이 지나는 동안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차 예매 안 하면 어떻게 내려가려고 하느냐?"고 화를 내면 "버스 타고 가면 되잖아"라며 태평이다. "으이그, 22개월 된 아이 데리고 열 몇 시간씩 버스 타고 싶니?" 앓느니 죽지 심정으로 철도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이번 추석은 6시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내 예매 성과가 좋다. 열심히 '클릭질'한 덕에 30여 분 만에 올라오는 차표를 구하고, 내려가는 차표는 '예약대기'가 됐다. 예매한 사람이 취소하면 차순으로 예약이 가능한 '예약대기'만 되도 거의 명절 전에 차표를 구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 안 되면 바로 전철역으로 가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가면 필요한 날 좌석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선물은 역시 물어보고 사야

이제 내려갈 차표를 구했으니 선물 차례다. 아이 짐도 많고 뭐 들고 가는 거 싫어하는 남편, 무조건 '택배'를 부르짖는다. 그럼 좀 본인이 알아보시지. 이 또한 내가 신경을 써야한다. 명절 택배는 일찍 마감이 되는 탓에 역시 언제까지 신청을 해야 하는지 미리 확인이 필요하다.


결혼 3년차, 시댁엔 무조건 차례상에 필요한 사과-배 세트다. 한우가 유명한 지역이어서 섣불리 한우를 택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이제 어머니도 우리가 보낼 줄 알고 장볼 때 과일은 빼두신다. 친정엔 건강이 좋지 않은 친정아빠를 염두에 두고 건강식품으로 골랐다가 집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도로 되가져왔다. 선물은 역시 미리 물어보고 사는 게 제일 좋다란 걸 새삼 깨닫는다.

22개월 된 아들, 시부모님께 재롱 피우게 만들기 

 추석을 맞아 한복을 입은 아들 한결이

추석을 맞아 한복을 입은 아들 한결이 ⓒ 문병호

드디어 귀성이다. 남편은 무거운 여행용 가방에 작은 짐 가방 하나 들고, 난 아이를 안은 채 기차에 오른다. KTX로 3시간,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로는 4시간 남짓, 아이가 1시간이라도 자주길 기대하는데 이 아가 가끔 한 숨도 안 자기도 한다. 강적이다. 남편과 내가 돌아가면서 기차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다. 시댁에 도착하기 전부터 벌써 기운이 쫙 빠진다.

워낙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몇 번 내려가지 못하는 시댁. 시부모님은 우리가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셨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론 확실히 반기는 정도가 달라졌다. 아이가 얼마나 컸나 보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요럴 때 맘껏 재롱을 부려주면 점수가 팍팍 오를 텐데 가끔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낯선 아들은 곧잘 안기는 할머니를 넘어 할아버지에게 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이번 추석을 앞두고선 말문이 트여 조잘대기 시작한 아이를 앞에 두고 반복학습에 돌입했다. "한결이, 우리 내일 뭐 타고 시골 가죠?" 물으면 아이가 "칙칙폭폭 기차"라고 대답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인사하기로 했죠?" 하니 22개월 된 아들, 두 손을 배에 올리고 귀엽게 배꼽인사를 한다. 요대로 시댁에 가서도 해야 할텐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집에만 가면 봉건주의로 회귀하는 남편... 얄밉다, 얄미워

여자들이 명절스트레스가 많다고 하던데 그나마 난 편한 편이다. 어머니가 상차림 준비를 거의 끝낸 뒤 도착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 몫은 주로 '전 부치기'다. 가족끼리만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준비하는 음식량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끼니 때마다 돌아오는 설거지는 아직 유일한 며느리인 내 차지다.

나름 진보적이라는 남편은 자기집에만 가면 봉건주의로 회귀한다. 결혼 후 처음 맞은 명절 때, 밥 먹고 설거지 하고 밥 먹고 설거지 하고가 너무 빨리 돌아와 짜증이 팍 나서 남편한테 "이래도 되느냐?"고 따졌더니 "아직 때가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도대체 그 '때'란 건 언제 돌아오는지 결혼 3년이 넘도록 남편은 시댁만 가면 노트북에 다운 받아간 영화나 만화 보고 자다가 밥 먹으라면 밥 먹는 게 다다. 아,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 만난다고 명절 전날 술 마시러 나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만 시댁에 남겨 두고….

그나마 임신했을 땐 슬그머니 와서 설거지도 몇 번 하더니 아이가 태어난 후 다시 '도로남'이 돼버렸다. 뭐, 아버님이 시키시는 농사를 거들기도 하고 애 보는 시늉을 하기도 하지만 시댁에만 가면 '휴식 모드'인 남편이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다. 결혼 전, 명절 때만 되면 소설책과 만화책을 쌓아놓고 지나간 드라마를 탐독했던 나의 달콤했던 연휴는 사라진 채, 남편만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배가 아플 수밖에.

'명절 이혼'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찮게 본다. 객지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웃음꽃을 피워야 할 명절이 결혼생활의 파국을 만들어내는 건 그리 큰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변했음에도 어머니, 아버지, 며느리, 남편 등으로 굳어진 역할들이 서로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불협화음을 내는 게 아닐까. 도덕시험의 모범정답처럼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남편, 이제 '때' 타령 그만하고, 부모님 눈치 보지 말고 '평등명절' 좀 실천해 보시지.

오늘 저녁에도 시어머니는 막내아들 내외와 손자가 잘 오나 기차역을 서성이고 계실 것이다. 아직 완벽하지 않고 바라는 것도 많지만 그래도 명절은 좋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의 정겨운 웃음이 있어서….
#추석 #평등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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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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