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내가 남긴 아홉 켤레의 구두, 그것은...

청소년기에 읽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다시 읽으며

등록 2010.09.30 11:18수정 2010.09.3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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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쏘공 알아? 00선생님이 난쏘공하고 장마? 이런 작품도 있나? 이 두 작품은 꼭 읽어 봐야 한다고 했거든. 엄마도 읽어 봤어요? 난쏘공과 장마 말이야."

"난쏘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럼 당연히 읽어봤지. 윤흥길의 <장마>?"

 

며칠 전 학교에서 돌아온 중3 딸아이가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리던 중에 이처럼 묻는다. 아이가 '난쏘공'이라고 말하는 소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여하간 공부에 목매다는 학교의 한 선생님께서 이처럼 의미 있는 작품을 아이들에게 권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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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겉그림 ⓒ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겉그림 ⓒ 창비

내친 김에 아이에게 읽히게 할 요량으로 두 작품, 그러니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장마>가 실린 책과, 첫째에게 주려고 <허삼관매혈기>를 샀다. 난, 워낙 우리 삶에 밀착된 이 작품들을 모두 철없던 시절에 읽었었다. 우리 아이에게 선생님이 읽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 청소년기의 내게 읽어야 한다고 했기에 말이다.

 

철없던 시절에 읽었던 만큼 작품을, 주인공의 심정을 절실하게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었던 책들이 내 사고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참으로 힘든 날, 소설 속 장면들이 떠오를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장마>와 함께 내 아이가 꼭 읽었으면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70년대지만 2010년 오늘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상황과 소시민들의 삶, 한 지식인의 추락 등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무리였지요. 우선 나 같은 인간이 태어난 그 자체가 무리였고 장질부사나 복막염 같은 걸로 죽을 기회를 다 놓치고는 아등바등 살아나서 처자식까지 거느린 게 무리였고, 광주단지에다 집을 마련한 게 무리였고, 이래저래 무리 아닌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중략) 난생처음 이십 평짜리 땅덩어리가 내 소유로 떨어진 것입니다. 내 차지가 된 그 이십 평이 너무도 대견해서 아침저녁으로 한 뼘 한 뼘 애무하다시피 재고 밟고 하느라고 나는 사실은 나 이상으로 불행한 어느 철거민의 소유였어야 할 그것이 협잡으로 나한테 굴러 떨어진 줄을 잊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나한테는 이 세상 전체가 끽해야 이십 평에서 그렇게 많이 벗어나게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책속에서 권씨

 

오 선생의 문간방에 어느 날 권씨가 이사 오게 된다. 달랑 보퉁이 몇 개뿐인 이삿짐을 앞세워. 사복 차림의 이 순경이 찾아와 그를 감시해 일거수일투족을 말해 달라 한다. 권씨는 정부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어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시받고 있음을 눈치 챈 권씨는 어느 날 늦은 밤 오 선생을 찾아와 자신이 왜 추락하고 말았는지에 대해 들려준다.

 

197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공업화우선 정책'으로 농촌 경제가 몰락하면서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들던 1970년대 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71년 8월에 실제로 있었던 광주 대단지사건에 연루되어 권씨가 정부의 감시를 받는 전과자가 된 것이다.

 

공업화 우선정책으로 서울에는 인구가 많이 늘어난다. 당시 10년 만에 300만이 늘었다고 한다. 살길을 찾아 서울로 온 사람들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주인공 난장이의 가족들처럼 무허가 판자촌에 집단 거주하게 된다. 하지만 도시개발이란 명분, 즉 도시화정책에 강제철거 당해 쫒겨 나 변두리를 전전하게 된다.

 

그들을 강제 이주시킨 곳이 지금의 성남, 당시의 경기도 광주. 교통과 수도 등 모든 생활제반시설이 열악했다. 거기다 이주민들은 토지불하대금을 한꺼번에 내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이에 이주민들은 반발한다. 소설 속 권씨는 서울에서 대학도 나오고 출판사에 다니던 중에 요행수로 광주단지의 이십 평을 불하받게 된다. 그리하여 광주대단지로 가게 된다.

 

선거가 끝난 다음날, 보름 안에 불하받은 땅에 집을 짓지 않으면 불하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통지서를 받는다. 권씨 내외는 벽돌 등을 사다가 얼기설기 집 모양새를 갖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하받은 토지대금을 한꺼번에 지불하라는 통지서를 받는다. 그것도 보름 안에. 권씨는 사방팔방으로 돈을 변통해 보나 마련하지 못하고 광주대단지 시위에 끼이게 된다.

 

이른 아침이었다. 문간방 툇마루에 앉아서 권씨가 구두를 닦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가 솔로 먼지나 터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바탕과 빛깔이 다르고 디자인이 다른 갖가지 구두를 대여섯 켤레나 툇마루에 늘어 놓은 채 그는 털고 바르고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거 팔 겁니까" 아침 인사 겸 농담 삼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팔 거냐구요?" 갑자기 일손을 멈추더니 그는 내발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신고 있는 구두를 유심히 쏘아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내 바짓가랑이와 저고리 앞섶을 타고 꼬물꼬물 기어 올라오는 그의 시선이 마침내 내 시선과 맞부딪치면서 차갑게 빛났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책속에서

 

소설 제목 중 '구두 아홉 켤레'는 무엇을 의미할까? 권씨가 입에 풀칠도 못하는 처지에 이처럼 구두를 애지중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소설은 훨씬 의미 있어 진다.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추레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오 선생에게 "나 이래 뵈도 안동 권씨 후손이요"라고 말하는 것도 함께 염두에 두고 말이다.

 

아내의 출산비용 때문에 오 선생 집에 강도로 돌변하여 뛰어들었던 권씨는 행방불명된다. 그가 돌아오지 않자 오 선생은 처음으로 권씨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문간방에 가보게 된다. 이불과 옷가지 몇 개, 밥을 끓여먹을 수 있는 간단한 도구 몇 개뿐인 초라한 그 방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장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열 받는 장병처럼 가지런히 놓여있는 구두 아홉 켤레.

 

공업화정책(산업화정책)으로 인한 정부의 도시화정책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선량한 소시민에서 빈민에 전과자로 추락하고 말았지만, 매일 구두를 번쩍번쩍하게 닦아 신는 것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존심을 스스로 자부하던 권씨는 이어지는 소설 <직선과 곡선>에서 가족 때문에 세상과 타협한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70년대 당시의 파행적인 도시화정책의 모순을 꼬집은 소설이다. 또한 당시의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삶을 다룬 연작소설이다. 모양새와 내용은 다르나 70년대 당시의 도시화정책이나 오늘날의 뉴타운 건설(재개발)이나 일부 사람들의 배만 불리는 '모순'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소설 속 권씨를 통해 70년대를 만나는 동안 뉴타운, 재개발, 시위, 화염병, 용산참사, 노조…,이런 말들과 함께 TV를 통해  봤던 최근 몇 년 수없이 봤던 장면들이 분분하게 겹쳐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권씨가 걱정스러워져서, 집을 나간 그가 아무 일 없이 어서 빨리 돌아와 힘내길 간절히 바라며. 

덧붙이는 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외|윤흥길 조세희 (지은이)|창비(창작과비평사)|2005-11-25|값 :8,000원 

※필자가 구입한 이 책 외에 몇 몇 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수록, 출간했습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윤흥길 지음,
문학과지성사, 1997


#도시화정책 #공업화정책 #윤흥길 #구두 #뉴타운(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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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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