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비너스인데, 몸뚱이는 아줌마네?

데비 한의 'The Eye of Perception'전 트렁크갤러리에서 10월 26일까지

등록 2010.10.11 15:56수정 2010.10.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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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갤러리 입구에 붙은 전시포스터. 번개머리로 유명한 데비 한 작가 ⓒ 김형순


요즘 '2009 소버린예술재단아시아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맹활약을 하는 데비 한(Debbie Han 1969~)은 '인식의 눈(The Eye of Perception)'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두 번째 개인전이 소격동 트렁크갤러리에서 10월 26일까지 열린다. 조각 등은 바로 옆 삼청동 aA디자인뮤지움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이런 10년간 작가의 다채로운 실험의 결과가 하나로 응축된 전시라 할 수 있다. 레이어 작업을 통해 한 장의 사진에 세계의 모든 미인들을 조각으로 새겨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사진조각(Photographic sculpture)'이 인상적인데, 깊이 있는 질감과 고전적 황홀감은 형용하기 힘들다.


제목에서 보듯 이번 전은 '미에 대한 인식'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진정한 미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이번 전 기획자인 박영숙 트렁크갤러리 관장은 3년간의 준비 끝에 내놓은 야심작이다. 이제 한 경지에 도달한 이 작가는 10여 년간 고민이 담긴 조각이면서 회화이면서 사진이기도한 개념미술을 선보이게 되는 셈이다.

서울거리와 홍대 앞에서 받은 문화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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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aA디자인뮤지움에 붙은 데비 한 개인전포스터 '인식의 눈(The Eye of Perception)'전 ⓒ 김형순


데비 한은 동포 작가로 11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가 UCLA 미대와 뉴욕 플랫인스티튜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산타모니카대학 교수가 된다. 그러나 작가를 지향하는 그로서 성에 차지 않아 2003-2004년 영은미술관과 쌈지 등 국내해외작가 창작스튜디오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그 후 서울에 안착한다.

그런데 그가 홍대 앞 쌈지작업실에서 본 입시학원들과 거기 벽에 걸린 예비미대생들이 기계처럼 그려낸 드로잉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는 일제(日帝)가 18세기 프랑스아카데미즘을 추종하다 생긴 산물인데 이런 방식이 예비 작가의 창의성을 키울 리 없다. 미국의 사정은 어떤지 작가에게 물었더니 실기시험은 없고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 정도란다.

그가 또 한 가지 놀란 건 서울거리에서 자연스럽고 품격 있는 동양미를 갖추고도 서양식쌍꺼풀을 만들고 코를 세우고 신격화된 서구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여성이 넘쳐난다는 현상이다. 그가 한국 문화를 끌어안으려고 한국에 왔는데 미국보다 더 미국적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한 모양이다.


비너스로 서구적 미를 해체하는 개념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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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신(Two Graces IV)' 2009. '자위하는 여신('Masturbating Grace)' 2008(우). '앉아있는 세 여신(Seated Three Graces) 중 부분화'[2009 소버린예술재단아시아작가상수상작](좌) ⓒ 데비 한(Debbie Han)


그는 철학을 미술로 작업하는 개념미술가로 미(美)란 단수가 아니고 복수이며 딱히 그 기준이나 중심이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비너스연작을 한국에서 시작된 것도, 역설적으로 비너스로 비너스신화를 해체시키려 한다. 그 대표적 예가 '자위하는 비너스'인데 이는 신성한 비너스에게 모욕주기다. 그의 별명이 '미의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이런 이유인가.

그가 이런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건 동서양문화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상충되는 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미의 우열에서 자유로운 데비 한은 위에서 보듯 비너스의 머리만 놔두고 한국아줌마의 몸매를 붙여 '비너스'를 만든다.

미의 전복자가 선보인 다양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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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향기' '상큼한 미소' 와이드컬러 프린트 라이트박스 65×50cm 2005. 여기서는 마늘로 우아한 목걸이를 만들고 쪽파로 가발을 만들어 여성을 여신으로 바꿔놓는다 ⓒ 데비 한(Debbi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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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비너스(Sport Venus I)' 나전칠기 60×27×32cm 2008. 나전칠기는 한국고유의 타발법을 쓴다. 이런 독특한 방식에 데비 한은 매려된다. ⓒ 데비 한(Debbie Han)


기존의 미 기준을 전복시키는 이 작가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런 별난 모험을 시도했다. 1998-2000년에는 사람들이 더럽고 추접하다고 생각하는 뉴욕거리의 개똥으로 맛난 초콜릿을, 길에 버려진 콘돔으로 예쁜 여자 속옷을 만들었다. 이렇게 번뜩이는 위트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국 미에 대한 편견을 깨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2005년 '식(食)과 색(色)'전을 열어 고춧가루로 립스틱을 만들고 마늘로 우아한 목걸이를, 쪽파로 가발을 만든다. 그래서 평범한 여자의 숨은 아름다움을 끄집어내어 에로틱한 여신으로 바꾼다. 그러다 새롭게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도자기와 나전칠기로 비너스를 만드는 것이다.

독자적 미를 통해 긍지와 자부심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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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눈(The Eye of Perception)' No.8 잉크젯프린트 100×79cm 2010 ⓒ 김형순


미의 기준이 지역과 풍토와 인종마다 다르다. 한국인이 8등신 비너스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독자적 시선을 가지는 것이 더 시급하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없다면 남의 것을 모방할 뿐 독창적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미는 결국 남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비 한은 상업광고에서 흔히 여성들의 몸이 비하되듯 문화가 사회, 경제,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잘 알기에 왜곡된 미가 인간의 삶에도 불행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계한다. '인식의 눈' 연작도 결국은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미'가 아니라 보이진 않지만 아우라가 넘치는 '그러한 미'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보자는 뜻 아닌가싶다.

여러 유형의 미인을 다층적으로 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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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눈(The Eye of Perception)' No.2 잉크젯프린트 100×79cm 2010. '무제(Untitled)' 종이에 펜 44×35cm 2009(아래) ⓒ 김형순


데비 한은 이렇게 미를 중심부, 주변부로 구별하지 않고 보다 평등하고 공정한 관계로 본다. 그래서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는 공식을 깬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이런 충돌하는 요소를 하이브리드하게 접근하면서 통합의 미학으로 나아간다.

왼쪽 드로잉은 위 두 번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6개월 전에 그냥 우연히 단번에 그린 것이란다. 그런데 이것이 작품으로 구현될지 몰랐다고 스스로 놀라워한다. 하여간 이 작가의 참신성은 세계 여러 유형의 미인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어 관객이 스스로 미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모든 여자는 다 나름대로의 최고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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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눈(The Eye of Perception)' No.4 잉크젯프린트 100×79cm 2010 다양한 인종의 얼굴을 중첩시킴으로써 진정한 나만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싶다 ⓒ 김형순


이 작품도 '인식의 눈' 연작에서 보듯 여러 인종의 미인들이 중첩되어 있다. 아프리카인의 두꺼운 입술, 유대인의 매부리코, 동양인의 튀어나온 광대뼈 등 이런 것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던 미의 영역을 발굴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파리나 뉴욕에 가서 한국여성의 미를 새삼 발견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리라.

"모든 여자는 한 가지 면에서 다 최고의 미인이다"라고 말이 있듯 모든 인종은 한 가지 면에서 다 최고의 미인이다. 그런데 미의 기준을 절대화하여 흑백 논리로 보는 것은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여자는 다 나름대로의 최고미인이다.

미지의 가능성이야말로 창작의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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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조건(Terms of Beauty VI)' 백자(white porcelain) each 54×25×28cm 2009. 아래는 작업을 하다 깨진 백자비너스 파편들 ⓒ 김형순


그는 백자를 굽다보면 크기가 10~15% 줄어드는데 머리가 무거운 비너스상이라 깨지기 십상이고, 사진의 픽셀 질감을 높이는데 몇 달씩 걸려 그만큼 시간과 인내를 요한단다. 그렇게 고된 마무리 작업을 하다보면 너무 지쳐 작업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결국은 해낸다.  

작업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 보니 누구는 도대체 이 쓸모없는 일에 왜 그렇게 열중 하냐고 묻기도 한다는데, 아름답게 사는 것과 쓸모 있게 사는 것은 분명 그 차원이 다르다. 예술이 당장 써먹는 건 아니나 균형 잡힌 미의식을 통해 인생을 향유하며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가능하게 하리라. 하여간 그는 예술의 힘을 굳게 믿는다.

끝으로 여기 개념 찬 작가 데비 한의 작업노트를 소개하면서 그의 전시평을 맺는다.

"[...] 과거에 나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과 오늘 또다시 마주한다. 과연 진정한 예술의 의미는 뭔가? 난 왜 창작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난 아직 만족할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만약 예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정의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다면 난 결코 예술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미지의 가능성이야말로 창작의 희열이다"

덧붙이는 글 | 트렁크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8-3번지. 02-3210-1233 http://www.trunkgallery.com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로 나와 덕성여고로 가다가 아트선재센터 지나 왼쪽에 있음
개관시간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월요일 휴관


덧붙이는 글 트렁크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8-3번지. 02-3210-1233 http://www.trunkgallery.com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로 나와 덕성여고로 가다가 아트선재센터 지나 왼쪽에 있음
개관시간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월요일 휴관
#데비 한 #DEBBIE HAN #트렁크갤러리 #AA디자인뮤지움 #박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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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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