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소재 화령전에 보관된 정조의 초상화. 화령전은 화성행궁과 붙어 있다.
김종성
'천도계획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런 계획이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수도 없는 것이, 정조가 웬만해서는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형적인 발언 여부만 갖고는 정조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 같은 정조의 인격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집권 초기에 그를 보좌한 최측근 중에 홍국영과 김종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매우 밀접한 동지관계였다. 이들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맹비난을 가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단둘이 있을 때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혜경궁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나오는 대화 내용이다.
"시방은 저들이 하는 대로 놔두고 외할아버지의 저러한 처지(무죄)를 밝혀 드리지 못하지만, 후왕(순조) 때에 이르면 제 아비를 보호하고 종사(나라)를 지킨 (홍봉한의) 충성을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홍봉한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홍국영·김종수가 홍봉한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발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당장에는 홍국영·김종수가 하자는 대로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밖에서는 홍국영·김종수에 대한 무한 신뢰를 표출하는 정조가, 어머니 앞에서는 툭 까놓고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정조는 김종수를 이용하여 홍국영을 실각시켰다. 비록 임금의 지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어제의 동지인 홍국영을 물어뜯는 김종수의 태도를 두고 혜경궁이 정조에게 "어쩜 저럴 수 있느냐?"고 말하자, 정조는 "지도 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정조의 밀명을 받고 홍국영을 공격하는 김종수 역시 실은 정조의 미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김종수 역시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정조는 속마음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실각되기 이전의 홍국영은, 정조 3년 9월 26일자(1779.11.4)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임금의 처소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따금씩 큰소리로 고함도 쳐보고 마치 왕이나 된 것처럼 시녀들을 끼고 유흥을 즐겼다. <한중록>에 따르면, 그는 임금의 밥상인 수라상까지 시켜 먹기도 했다.
홍국영은 정조 임금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은 정조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으며 조만간 제거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에, 그처럼 방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겉으로 드러나는 발언 여부만 갖고 정조를 파악하기에는 정조란 인물의 속마음이 너무나 깊고도 깊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가 화성 천도에 관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것만 갖고는 정조가 그런 계획을 품지 않았다고 곧바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정조처럼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의 의중을 파악하려면, 발언 여부보다는 행적 여하를 분석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한 방법이 될 것이다. 화성 문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객관적 행적 가운데에서 주요한 7가지를 살펴보면서, 그가 과연 화성 천도를 계획했는지 여부를 판단해 보기로 하자.
#1 아버지를 격상시키고 그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다즉위년인 1776년에 정조는 오늘날의 서울시 동대문구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시켰다. 왕실의 무덤은 능-원-묘의 3등급 체제였기 때문에, 이 조치는 아버지의 무덤을 제3등급에서 제2등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죄인 신분으로 죽은 아버지의 위상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세울 수 없었기에, 정조는 꼭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13년 뒤인 정조 13년(1789), 정조는 화성 건설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수원을 유수부(광역시) 급으로 승격시킨 다음에 수원의 명칭을 화성으로 바꾸었다.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와 직결된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그곳에 신도시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정조가 화성과 관련하여 뭔가 대단한 결심을 굳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