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윤동주 생가, '별 헤는 밤'이 울려퍼졌다

등록 2010.11.03 15:50수정 2010.11.0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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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은 시인의 옛집은 어둠에 쌓여 있었다. 이 집은 생가터에 복원된 집이란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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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장면. 모두가 경청하고 있다. ⓒ 김현


용정에서 명동촌까진 버스로 20여분 거리다. 불빛 가득한 도심을 지나 명동촌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시골 냄새다. 풀 향기와 흙 냄새 그리고 거름 냄새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또 하나 진한 어둠이 들어왔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버스의 불빛뿐이다. 어둠 속에서 성근 별처럼 실루엣 같은 건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불빛은 없었다. 그저 까만 어둠만이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묵묵히 맞아주었다.


어둠은 사람에게 두 가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두려움과 평화로움이다. 혼자 있을 때나 마음이 불안할 때 어둠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정다운 여인이나 함께 하고픈 벗과 있을 땐 어둠은 평화로움과 추억을 가져준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어둠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명동촌'이라 쓰인 표석이 입구에 장승처럼 서있다. 핸드폰 라이트를 켜야 겨우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걸어가자 건물 하나가 나온다. 교회 건물이다. 지붕 위로 뾰족한 십자가가 어둠 때문에 보일락 말락한다. 허름한 교회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십자가를 생각하며 시인은 시 '십자가'를 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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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생가 옆에 있는 교회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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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십자가 ⓒ 김현


교회당 꼭대기에 걸려있는 십자가, 올라가고 싶지만 올라갈 수 없는 시인. 예수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암울한 조국 앞에 자신도 십자가를 지고 싶고 피를 흘리겠다는 시인은 지금 이 자리에 없지만 그가 살았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찾게 한다.

그러나 윤동주의 생가를 둘러보면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들러 시인이 살았던 흔적을 보고 가지만 그의 마음, 그의 생각까지 담아갈까? 한평생 아무런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자 했던 치열한 한 청년의 그 순결한 마음을 읽고는 갈까?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여행이란 게 그렇듯이 부산하게 왔다가 주마간산처럼 떠들썩하게 훑어보다 가고 만다. 특히 무리지어 하는 여행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부산하게 왔다가 부산하게 가는 여행의 뒤끝엔 씁쓸함이 남게 된다.

달빛 아래 낭송하는 '별 헤는 밤'은 시인의 마당에 울려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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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기전대 김춘자 학생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하고 있다. ⓒ 김현


윤동주 시인이 열다섯까지 살았던 집은 어둠 가운데 고요히 앉아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외딴 집, 밝은 시간에 왔으면 주변 풍경은 물론 시인의 묘지가 있는 뒷산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함이 내내 아쉬웠다. 그렇지만 밤은 그만의 운치가 있다. 깜깜한 밤을 울리는 작은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와 성글게 떠있는 몇 개의 별, 그리고 저 높이 떠서 지상을 가볍게 밝혀주는 달만이 밤의 맛을 더해주었다.

이 고즈넉한 밤, 시인의 마음을 잔잔하게 읊어주는 사람이 있다. 전주기전대학에 다니는 김춘자씨다. 40이 훌쩍 넘긴 나이에 대학에 들어와 공부한다는 김춘자씨는 나긋나긋한 감성적 목소리로 '별 헤는 밤'을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집 마당에 서서 시인을 노래했다. 오직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선율처럼 화음을 맞춰주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중략)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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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에서 바라본 달 ⓒ 김현


그런데 참 이상하다. 평상시 무덤덤하게 다가왔던 '별 헤는 밤'을 시인의 마당에서 듣고 있노라니 시인이 지금이 이 자리에서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지금 별들이 촘촘히 떠 비춰주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은 이곳 북간도 명동촌 마당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시심을 키웠고 자랐을 것이다. 그러다 이 시를 쓸 당시 그는 어느 낯선 곳에서 가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렸을 거고 함께 웃고 떠들며 지냈던 친구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시인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렸던 언덕은 시인의 집 뒤에 있는 언덕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을 직접 보다보니 왜 시인이 십자가의 첨탑과 별과 하늘 그리고 동무들을 노래했는지 절로 알게 된다. 그리고 시인의 시들이 살아서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단순히 활자화된 작품들이 생생한 육성으로 다가옴을 알 수 있다.

낭송이 끝나자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씨가 이 시를 "예언 같은 시"라고 말한다.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 실험용 주사를 맞고 비통한 죽음을 당했을 때 시인의 육신을 가슴에 안고 온 사람이 윤형주의 아버지란다. 그때 동주의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렇게 꿈 많던 젊은이 윤동주는 낯선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와 삼촌은 화장을 한 시신의 유골을 가지고 와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세월이 흘렀다. 가족들은 북간도를 떠나거나 사망했다. 그러는 사이 동주는 잊혀졌다. 그의 시처럼 이름자를 흙으로 덮은 것처럼. 그러다 동주가 죽은 15년 후 시집이 출간되면서 윤동주는 우리 곁에 다가왔다. 무덤 위에 푸른 잔디가 피어나고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 풀이 무성하듯이 말이다. 허나 우리는 시인의 집 뒤에 있다는 무덤가에는 가보지 못했다. 늦은 밤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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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추모의 꽃을 헌사해 놓았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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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명동소학교 건물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찻집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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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란 건물에 붙어 있는 나무판에 걸려 있는 글이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 김현


시낭송이 끝나고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윤동주의 사진이었다. 방안엔 '시인 윤동주 서거 64주기 추모'란 현수막과 함께 꽃항아리가 단정하게 놓여 있다. 무슨 노동조합 위원장인 민경윤이란 이름이 달려 있다. 해마다 누군가가 시인 윤동주를 잊지 않고 이렇게 꽃다발을 놓고 갔나 보았다.

방을 구경하였다. 어둠이 가득한 방안을 비춰주는 건 손전화기의 불빛뿐이다. 집 안의 구조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완 많이 달랐다. 남쪽에선 부엌과 방 사이에 칸막이가 있는데 북간도의 집은 칸막이가 없다. 부엌과 방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추위가 심한 북쪽에서 좀 더 난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란다. 또 하나 북간도의 방 구조가 북한의 방 구조와 비슷하다고 한다.

시인이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을 떠나 숙소로 돌아오는 시간, 시계를 보니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시내에 도착하기 전까지 돌아오는 길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시인의 집도 날이 밝아오기 전까지 그렇게 어둠과 함께 밤을 지새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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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이는 건물 마당이 윤동주 장례식이 치러졌던 곳이다. ⓒ 김현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지난 8월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기는 지난 8월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윤동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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