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후이마누에 들어선 '대조선국민군단'

박용만과 그의 시대 39

등록 2010.11.29 14:53수정 2010.11.2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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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a  하와이의 오하우섬. 국민군단이 설립된 카할루 지역과 아후이마누 마을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오하우섬은 제주도 보다 약간 작다.

하와이의 오하우섬. 국민군단이 설립된 카할루 지역과 아후이마누 마을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오하우섬은 제주도 보다 약간 작다. ⓒ NAOO(미 연방정부기관).제작권해제


박종수의 농장은 산 너머에 있었다. 호놀룰루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코올라우 산맥 때문이었다. 코올라우 산맥은 호놀룰루 동북쪽을 절벽처럼 가로 막아 달린다. 쉽게 말해 한반도의 태백산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산세도 마찬가지여서 산맥 속의 한 봉우리인 카알라산은 자그마치 1200m나 치솟는다.

박종수의 농장이 있던 아후이마누 마을은 쉽게 말해 강릉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강릉을 가자면 험한 대관령을 넘지 않는가. 호놀룰루에서 아후이마누를 가자면 산 중턱을 뚫은 터널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리는 약 50리 정도.

그 아후이마누에서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이 창설됐다.

a  1백여 년 전 박종수의 파인애플 농장이 있었고 박용만이 군사훈련을 시켰던 아후이마누 마을은 현재 호놀룰루로 출퇴근하는 주택지로 변했다.

1백여 년 전 박종수의 파인애플 농장이 있었고 박용만이 군사훈련을 시켰던 아후이마누 마을은 현재 호놀룰루로 출퇴근하는 주택지로 변했다. ⓒ 독립기념관


박종수는 얼핏 인상만 봐도 믿음이 가는 사람이다. 또 파인애플 경작의 경험도 있었다. 당시 카할루 지역 일대의 농장은 리비 & 맥넬(Libby $ M'cnell)회사 소유였다. 박종수는 회사의 신용이 좋아 경작지로 약 120만 평을 임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백 명의 한인들을 경작자로 유치했다. 120만 평의 경작지 중 약 90만 평을 박종수는 대조선국민군단의 훈련기지로 내놓았다.


a  국민군단에 기지를 제공한 박종수(1858-1951)

국민군단에 기지를 제공한 박종수(1858-1951) ⓒ 독립기념관


1915년 안창호가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현지의 유지들 명단을 작성한 적이 있다. 그 명단 속에 박종수의 이름이 보인다. 1938년 3월 안창호의 추모식이 열렸을 때 그는 기도순서를  맡았다. 다른 이력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신앙도 깊지 않았나 싶다.

1920년대 말 임시정부 주석 김구로부터 임시정부가 재정적으로 몹시 어렵다는 편지를 받았다. 임시정부 설립 때부터 후원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박종수는 이 사실을 주위에 알리고 모금운동에 나섰다. 박용만과 어울리다 보니 이승만 정권에 미운털이 박혔다. 뒤늦게 199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애족장을 받았다.


박종수는 평양 사람이다. 나이는 박용만에게 아버지뻘이었다. 무려 23세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박용만을 뒷받침하는데 군소리가 없었다. 박용만이 군단장이었고, 그는 그 밑에서 사관학교 격인 병학교의 대대장과 훈련대의 대대장을 맡았다. 박종수는 종내 그의 가진 것 거의 모두를 대조선국민군단에 바쳤다.

박종수의 헌신에 대해 박용만은 1914년 5월 16일자 <국민보>에 기사를 실었다.

"(전략) 천시를 얻음인지 지리를 이용함인지 인화를 만듦인지 본보 사장(주-박용만을 뜻함)의 '산넘어' 일은 발전되는 힘이 날로 장성하여 한편에서는 막사를 짓고 한편에서는 잡역을 시작하여 백여 명 건장한 사나이들이 풍우를 무릅쓰고 주야를 불계하고 백 가지 근무를 차례로 행하여 가는 중에 농주인 박종수 씨는 평생의 근본적 마음을 이제 비로소 실행하기를 작정하고 천여 에이커 농장의 사사이익을 온전히 국민군단에 바쳐 농장소출의 이익과 사무처리의 주권을 전체로 군단장에게 맡기고 심지어 자기 집 밥그릇 숟가락까지도 그대로 내여 놓아 본월 12일에 일반 단원과 일반 동포에게 대하여 이 말을 반포하고 필경에는 자기와 가속과 자기의 육신까지 모두 군단에 바쳐 한 집안 식구가 모두 군단의 생활을 견디며 고생하기로 결심하고 평생의 가슴을 열어 동포와 하나님께 고하매 일반단원들은 감축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며 일반 방관자들은 감동하는 눈물이 스스로 동하여 다만 국민군단이 속히 성립하기를 비는 가운데 근자 와이아홀레에서 파인애플로 영업하는 이치경 씨는 또 박종수 씨의 뜻을 함께 하여 자기도 또한 일반 농리를 군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동포와 하나님 앞에 동일하게 맹세. (중략)"

기사를 읽어보면 그 다음 달 10일에 국민군단이 창설될 수 있었던 것은 5월 12일 있었던 박종수의 대 결단과 뒤이어 있었던 이치경의 헌납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또 인화를 얻음인지 박종수 농장의 지주인 맥펠레인은 한인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막사를 수리하는데 재목을 대주고 물품을 외상으로 공급하며 유형무형, 직접간접으로 협조를 해줘 한인들을 감동케 했다. 그 감동을 박용만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미국 사람은 조선 장래에 대하여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거니와 우리 하와이 한인 5천 명이 평균히 카할루 농주만치만 힘써 주면 '산넘어' 일의 성공은 날을 기약하고 기다리련만은 이렇게 힘들고 속 타고 백 가지 초창한 때에 타처 동포는 방관자의 지위만 지킴이 민망하도다. 아모커나 우리 동포의 돕고자 하는 마음을 모름이 아니요, 또한 마음과 힘으로 돕는 자 온전히 입는 것은 아니라.

그러므로 호놀룰루와 카할루 등지에 있어 군단의 기초를 친히 보고 군단의 발전을 확실히 알며 또한 단원들이 어떻게 곤란을 당하는 것은 성심으로 어여삐 여기는 이들은 다소간 스스로 돕기를 힘써 김주현, 정남교, 유동면, 임봉춘 같은 이들은 돕는 친구들 중에 더욱 도와 성력과 재력으로 순전한 성의를 보이거니와 또 와히아와 안종순 같은 친구는 일등 목수의 대대한 공전을 받는 사람으로 이제 사업을 버리고 친히 농장에 들어가 국민군단의 막사를 건축하기에 종사하니 이는 '국민보'가 국민군단을 대신하여 성심으로 몇몇 친구에게 감사함인저. (하략) "

막사의 준공과 국민군단 훈련 개학식이 다가옴에 따라 인원은 1백여 명에서 1백6십여 명으로 불어났다. 호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둔전제'의 이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군사훈련만 받는 것이라면 생계수단을 달리 마련치 않으면 안 된다. 어차피 다른 농장에서도 노동할 것이라면 군사훈련을 동시에 받음으로서 애국심도 발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막사를 짓는 것도 다급했지만 군복과 군화를 지급하지 않고서는 군인의 모습을 갖출 수 없는 일이었다. 박용만은 피복창을 설립하고 재봉에 익숙한 훈련생 네 사람으로 군복제조를 담당케 했다. 싱거미싱 하와이지사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는 조광호는 '산 너머'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재봉틀 한 대를 피복창에 기증했다.

또한 군화를 제작하는 제피소도 설립했다. 신, 행견, 말안장, 말굴레와 일반 피혁제품을 제조하는 훈련생 중 삼 사 인을 제피소에서 일하게 했다. 피혁 제조하는 기계와 부수 물품을 완전히 준비하고 작업을 시작케 했는데, 재료를 고급으로 구입해서 견고한 군화를 제작케 했다. 구한말 육군부에서 제작하던 군화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지 않았다. 훈련생들에게 공급한 다음부터는 군단의 재정수입을 올리기 위해 일반에게도 판매하기로 했다.

이처럼 국민군단을 일떠세우는데 많은 훈련생들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 동포들 앞에 실체가 드러나는 개소식 날짜는 하루하루 조여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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