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65)

[우리 말에 마음쓰기962] '걸리적거리는 존재', '땅이 존재, 평야가 존재' 다듬기

등록 2010.12.06 16:33수정 2010.12.06 16:33
0
원고료로 응원
ㄱ. 걸리적거리는 존재

.. "금방 알게 될 거야. 내가 주이치의 앞날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라는 걸 말야." ..  <츠치다 세이키/김현정 옮김-두루미 아빠 (하)>(대원씨아이,2003) 78쪽


"금방 알게 될 거야"는 "금방 알 수 있어"나 "금방 알게 돼"나 "금방 알겠지"로 다듬어 줍니다. "주이치의 앞날에"는 "주이치 앞날에"로 손보고, "-라는 걸 말야"는 "-임을 말야"로 손봅니다. '존재'를 한데 묶어 "걸리적거리는 줄 말야"나 "걸림돌이 되는 줄 말야"로 손질해 보아도 됩니다.

 ┌ 걸리적거리는 존재라는
 │
 │→ 걸리적거리는 사람이라는
 │→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라는
 │→ 걸리적거린다는
 │→ 걸림돌이라는
 └ …

'걸리적거리는 무엇'이란 한 마디로 하면 '걸림돌'입니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 주는 무엇이라 한다면 '이음돌'이나 '이음새'나 '징검다리'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꾸밈없이 적바림하던 말투가 차츰 옅어지면서 이 보기글처럼 "걸리적거리는 존재" 같은 말투가 톡톡 튀어나옵니다. 말 그대로 적고프다면, 또 '무엇'을 힘주어 밝히고 싶다면, "걸리적거리는 사람"이나 "걸리적거리는 돌"이나 "걸리적거리는 덫"이나 "걸리적거리는 수렁"이나 "걸리적거리는 도랑"처럼 적바림하면 됩니다. "내가 주이치 앞날에 걸리적거리는 줄 말야"처럼 적바림하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말끔합니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이처럼 알맞고 바르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도록 가르치거나 이끌지 못합니다. 알맞고 바르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도록 도와주는 책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우리 말글은 한국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으레 잘 배우는 줄 잘못 압니다. 차근차근 익혀야 할 뿐 아니라, 나이가 든 뒤에도 꾸준히 가다듬어야 올바르게 쓸 수 있는 말글인 줄 헤아리지 못합니다.

ㄴ. 땅이 존재, 평야가 존재


.. 각 예술품에는 배경이 있다. 그것이 만들어진 땅, 가치 있게 쓰인 땅, 그리고 오랫동안 묻혀 있던 땅이 있다. 또 예술품에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한 땅도 존재한다 … 기온이 높고 평야가 존재하며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농업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은 이미 완비되어 있었다 ..  <이케자와 나쓰키/노재영 옮김-문명의 산책자>(산책자,2009) 19∼20, 225쪽

"각(各) 예술품에는"은 "예술품에는"이나 "예술품마다"나 "모든 예술품에는"으로 다듬고, '배경(背景)'은 그대로 둘 수 있으나 '이야기'로 다듬습니다. '그것'은 '예술품'으로 고쳐 줍니다. '그것'이라는 대이름씨는 써야 할 자리에는 써야 하지만 이런 자리에는 함부로 안 써야 알맞습니다. '가치(價値) 있게'는 '값있게'나 '값어치 있게'나 '뜻있게'나 '보람 있게'로 손보고, "인간적(人間的)인 의미(意味)를 부여(附與)한"은 "따스한 마음을 심어 준"이나 "따순 사랑을 담아 준"으로 손보며, '평야(平野)'는 '들판'이나 '너른들'로 손봅니다. "최적(最適)의 조건(條件)은"은 "좋은 조건은"이나 "좋은 바탕은"이나 "좋은 터전은"으로 손질하고, '완비(完備)되어'는 '갖춰져'나 '잘 갖춰져'나 '빈틈없이 마련되어'로 손질해 봅니다.

 ┌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한 땅도 존재한다
 │
 │→ 따스한 뜻을 담은 땅도 있다
 │→ 따순 사랑을 갈무리한 땅도 있다
 │→ 살가운 이야기를 심어 준 땅도 있다
 └ …

사람들 누구나 제 말버릇을 바꾸거나 고치거나 가다듬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어린 나날부터 익숙하거나 길든 말버릇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입니다. 좋은 말투라 하든 궂은 말투라 하든 무척 오랫동안 고이 이어가곤 합니다. 한 번 입이나 손에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말투이고 말결이며 말씨입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 배움터 가운데 아이들한테 말다운 말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배움터는 배움터라는 이름 그대로 아이들이 옳고 바른 넋을 일구며 옳고 바른 삶을 사랑하도록 옳고 바른 말을 배우는 자리이지 못합니다. 대학바라기 싸움터인 배움터입니다. 더 많은 지식과 더 잦은 시험과 더 거친 점수에 얽매이도록 내몹니다.

살아숨쉬는 말이 아닌 지식에 갇힌 말만 듣고 쓰며 외워서 크는 어린이입니다. 싱그러운 말이 아닌 딱딱한 시험 문제로 뒤덮인 말만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생각하는 가운데 자라는 푸름이입니다.

보기글을 찬찬히 살피면, 첫머리에 "배경이 있다"라는 글월과 "땅이 있다"라는 글월이 나옵니다. 그러나 곧바로 "땅이 존재한다"라는 글월이 나옵니다. 나중에는 "평야가 존재하며"라는 글월이 나옵니다. 모든 자리에 '존재'라는 낱말을 쓰지는 않으니 그나마 낫다 여길 만하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있다'라는 낱말로 알뜰히 여미지 못했기에 아쉽습니다. 안쓰럽고 슬픕니다. 차분하게 들여다보며 내 글줄과 말마디를 추스를 수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을 테니까요. 내 글 한 줄을 더 사랑하고 아끼며 매만질 수 있으면 이와 같은 글을 쓰지는 않을 테니까요.

 ┌ 평야가 존재하며
 │
 │→ 들판이 있으며
 │→ 너른들이 자리하며
 └ …

국어사전에 '너른들'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너른 들'처럼 띄어서 적어야 맞다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너른들'처럼 붙여서 적바림합니다. '너른바다'와 '너른하늘'처럼 '너른-'이라는 앞가지를 쓰고 싶습니다. 아니, 이렇게 써야 잘 어울리며 알맞다고 느낍니다. '너른마음'과 '너른사랑'과 '너른믿음'처럼 차근차근 새 낱말을 일구어 볼 만하다고 여깁니다. 우리 말이 곱다고 외치거나 우리 글이 훌륭하다고 자랑해 본들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늘 쓰는 낱말을 더 깊이 생각하면서 북돋울 노릇이고, 흔하며 너른 낱말을 알뜰살뜰 가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존재'와 같은 한자말 쓰임새를 헤아리다 보면, 이 한자말을 다듬어야 할는지 그대로 두어야 할는지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 알맞춤하며 마땅한 길을 찾는다고 느낍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이 예전에 <길안에서 택시 잡기>라는 시를 쓴 적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이 시를 문득문득 떠올리는데, 시골에서는 택시를 타건 버스를 타건 참 만만하지 않습니다. 택시삯은 도시와 견주면 두어 곱은 비싸고, 버스는 한두 시간에 한 대 다니면 잘 다니는 꼴입니다. 그나마 큰길로만 다니는 버스이니, 버스를 타러 오가는 데에 오래 걸립니다.

시골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은 드물고, 서울처럼 큰 도시에서 떠도는 숱한 이야기란 없습니다. 남을 해코지한다거나 더 많은 물건을 팔아 더 큰 돈을 벌어야 한다는 흐름이란 거의 없으며, 아예 없는 곳이 많습니다. 시골사람 말매무새는 도시사람 말매무새랑 아주 다릅니다. 시골사람이 글을 쓸 때에 '존재' 같은 한자말이 튀어나올 까닭이 없어요. 도시사람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면 '존재' 같은 한자말이 쉽게 튀어나옵니다. 아무래도 삶에 따라 말글이 다르기 때문일 테니까요.

문화를 말하든 정치를 말하든 교육을 말하든 매한가지입니다. 도시사람 눈높이에서 말하느냐 시골사람 눈썰미에서 말하느냐는 몹시 다릅니다. 어른 자리에서 말하느냐 어린이 키높이로 말하느냐는 사뭇 달라요. 대학교수 깜냥으로 말하느냐 시골 할매 슬기로 말하느냐는 참 다르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대학교는 흔히 나올 뿐더러,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갖가지 지식을 높이 삽니다. 삶을 우러르지 않고 지식을 우러르는 한국땅이에요.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지식을 사랑하는 한국사람이에요. 삶을 드높이기보다 지식을 드높이는 한국 지식인이랍니다.

저마다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존재' 같은 한자말을 쓰고프다면 얼마든지 써도 됩니다. '존재' 같은 한자말을 안 쓰고프다면 즐거이 안 쓰면 돼요. 쓴다 해서 더 나쁜 사람이 아니요, 안 쓴다 해서 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다만, "땅이 있다"라 말할 때하고 "대지가 존재한다"라 말할 때에는 뜻과 느낌이 꼭 같습니다만, 말투와 말넋과 말삶은 아주 다릅니다.

뜻과 느낌은 같으나 말투와 말넋과 말삶은 크게 다른 줄을 깨달으며 한자말 '존재'를 비롯한 숱한 지식조각 말마디를 톺아보면 좋겠어요. 국어사전에만 깃들어 있는 죽은 토박이말을 살린다고 우리 말글을 살리는 일이 될 수 없고, 사람들이 자주 쓴다는 한자말을 즐겨쓴다고 살림말(생활어)을 쓰는 셈이 아닙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존재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5. 5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