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103) 의당

[우리 말에 마음쓰기 963] '분말'하고 '가루'하고

등록 2010.12.07 15:05수정 2010.12.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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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의당

.. 나는 의당 수(아버지 영향)와 문학(엄마 영향)에 밝아야 하는 딸아이에게 합당한 임무를 주었다 ..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수지 모르겐스턴+알리야 모르겐스턴/최윤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1997) 167쪽


"아버지의 영향"이나 "엄마의 영향"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 영향"과 "엄마 영향"이라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다만,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영향(影響)'을 덜고 "아버지 때문"이나 "엄마가 낳았으니"처럼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합당(合當)한'은 '알맞을'이나 '알맞춤한'이나 '꼭 들어맞을'이나 '바람직할'로 손보고, '임무(任務)'는 '일'이나 '일감'이나 '일거리'로 손봅니다.

 ┌ 의당(宜當) : 사물의 이치에 따라 마땅히
 │   - 법은 의당 지켜야 한다 / 의당한 말 / 의당한 일이다 /
 │     강실이는 의당 옹구네한테 말을 놓아야 옳을 것이나
 │
 ├ 의당 수와 문학에 밝아야 하는
 │→ 마땅히 수와 문학에 밝아야 하는
 │→ 반드시 수와 문학에 밝아야 하는
 │→ 으레 수와 문학에 밝아야 하는
 │→ 틀림없이 수와 문학에 밝아야 하는
 └ …

우리 말은 '마땅하다'입니다. 한자말은 '당연(當然)하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 말과 한자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뿐더러, 제대로 가누지조차 않습니다. 마땅히 써야 할 우리 말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안 씁니다.

국어사전에서 '마땅하다'라는 우리 말을 찾아보면 한 가지 나옵니다. 다시금 '당연'이라는 한자말을 찾아보면 다섯 가지 나옵니다. 이 가운데 사람들이 알거나 쓰는 한자말은 꼭 한 가지입니다. 다른 네 가지 한자말 '당연'을 아는 사람이란 거의 아무도 없으며, 이 한자말이 쓰이는 일이란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당연'이라는 한자말이 그냥 다섯 가지 실립니다. 이러면서 국어사전에 실린 '토박이말 푼수는 저절로 줄'고 '한자말 푼수는 저절로 늘'어납니다.

 ┌ 법은 의당 지켜야 한다
 │→ 법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 법은 꼭 지켜야 한다
 │→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 법은 어김없이 지켜야 한다
 ├ 의당한 말 → 마땅한 말 / 옳은 말 / 올바른 말
 └ 의당한 일이다 → 마땅한 일이다 / 옳은 일이다 / 틀림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마땅히 써야 할 우리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마땅히 알맞고 바르며 곱게 써야 할 우리 글입니다. 무슨 덧말과 어떤 군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알뜰살뜰 살려서 쓸 말이요 요모조모 북돋울 글일 텐데요. 밥을 하는 사람은 밥맛이 한결 살도록 애쓰고, 말을 하는 사람은 말맛이 더욱 살도록 힘쓸 노릇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정치가 아름답도록 용쓰고, 말을 하는 사람은 말이 참으로 아름답도록 마음쓸 일입니다.

ㄴ. 분말

.. 물로 반죽한 쌀 분말을 가는 헝겊 위에 펼쳐놓는다 ..  <문명의 산책자>(이케자와 나쓰키/노재영 옮김, 산책자, 2009) 255쪽

보기글을 보면, '가루'라 적으면 될 낱말은 '분말'이라 적었으나, '미세(微細)' 같은 한자말로 적을까 걱정스러운 낱말은 '가는'이라 적습니다. 두 곳 모두 알맞고 살가이 가눈다면 한결 아름답습니다. 두 낱말을 함께 올바르고 알뜰히 가다듬는다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 분말(粉末) = 가루
 │   - 곱게 빻아 미세한 분말로 만들었다 /
 │     두 개의 컵에 물을 붓고 오렌지 분말을 넣었다
 ├ 분말(噴沫) : 거품을 내뿜음
 │
 ├ 쌀 분말 (x)
 └ 쌀가루 (o)

사람들이 익히 쓰는 한자말 '분말'은 '가루'를 뜻합니다. 잘게 부수거나 갈아서 만든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에 '가루'라 하는데, 토박이말 '가루'를 한자로 옮겨적으면 '粉末'입니다.

옥편이든 국어사전이든 찬찬히 뒤적여 보았다면 '분말가루' 같은 엉터리말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옥편을 찾지 않고 국어사전 또한 뒤적이지 않으니 '분말가루'처럼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말이 자꾸자꾸 쓰임새를 넓힙니다. 교수이든 교사이든 기자이든 학자이든 얄딱구리한 낱말을 털어내지 못합니다.

옥수수가루이거나 청국장가루이거나 고구마가루입니다. 옥수수'분말가루'나 청국장'분말가루'나 고구마'분말가루'가 아닙니다. 한자말을 잇달아 붙인 '분말분말'이든 토박이말을 겹으로 붙인 '가루가루' 같은 낱말을 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한자말과 토박이말을 붙인 '분말가루'는 마치 남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새로운 가루'를 일컫는 듯 여깁니다.

국어사전에서 한자말 '분말'을 찾아보면 '噴沫'이라는 낱말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거품을 내뿜음"을 뜻하는 낱말이라는데, 이러한 뜻으로 '噴沫'이라는 낱말을 쓸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거품을 내뿜는다"라 말하면 되지 "분말한다"고 말할 까닭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국어사전에 나란히 실린 '噴沫'이지만 이런 한자말은 국어사전에서 마땅히 덜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쓸데없을 뿐 아니라 쓸모가 없는데 국어사전에 실었으니, 국어사전은 국어사전 노릇을 못하고 옥편 구실을 하고야 맙니다.

 ┌ 미세한 분말로 만들었다
 │→ 가는 가루로 만들었다
 │→ 잔 가루로 만들었다
 │→ 잘디잔 가루로 만들었다
 │
 ├ 두 개의 컵에 물을 붓고 오렌지 분말을 넣었다
 │→ 두 컵에 물을 붓고 오렌지 가루를 넣었다
 │→ 컵 두 개에 물을 붓고 오렌지 가루를 넣었다
 └ …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써야 합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겠다는 나라밖 사람 또한 한국말을 써야 합니다. 한겨레이든 다른 겨레이든 한국땅에서 한국사람과 어울리면서 쓸 한국말이란 무늬만 한국말이 아닌 참다운 한국말이어야 합니다. 겉보기로 한글이라 해서 한국말이지 않습니다. 속살과 알맹이 모두 오롯이 한국말이어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쉽고 알맞으며 즐거이 쓸 토박이 낱말이 있는데 애써 군더더기 한자말을 받아들여 쓴다면 우리 말뿐 아니라 우리 넋이 뒤흔들립니다. 우리 삶 또한 어수선해지고 맙니다. 넋을 살리는 말이요 삶을 가꾸는 말입니다. 얼을 빛내는 글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와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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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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