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번째 마지막 생일시를 썼습니다

못난 담임의 짝사랑 이야기

등록 2010.12.22 13:45수정 2010.12.2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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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에 '솔비'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어요. 엄마가 자모회 열성 회원이신데 엄마는 솔비를 똘비라고 부르더군요. 그날부터 저도 똘비라고 부르고 있지요. 녀석이 제 엄마 안 닮고 어찌나 순딩이인지 몰라요. 좀 친해지려고 수작을 부려도 통 곁을 주지 않았는데 오늘 녀석 생일이네요. 어제 몸이 아프다고 조퇴하고 가더니 늦은 밤에야 이런 짧은 편지가 왔네요.
 
'선생님 맞아요? 저 솔비예요'
 
순딩이가 생일시는 받고 싶었나 봐요. 먼저 편지 안하면 생일시 안 써준다고 했거든요. 최근 몇 녀석이 편지 안 해서 생일시 못 받고 있었고요. 일단 메일주소를 확인하고 편지를 쓸 모양이구나 싶어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지요.

'몸은 좀 어떠냐?
좀 괜찮아진 모양이구나.
선생님 메일 맞으니까 마음 놓고 편지 쓰거라.
그럼...

그 뒤에 온 편지와 답장입니다.
 
'선생님안녕하세요~
아까 와서 푹 쉬고 왔어요. 이제 끄떡없어요.^ ^
음...전 꿈이 사육사와 유치원 선생님이었어요.
근데 유치원 선생님을 하고 싶던 마음이 더 컸던 거 같아요.
아이들도 볼 수 있고 좋을 것 같았거든요. 헤헤^^
근데 고등학교 오면서 취업 마음으로 온 거였어요.
2학년 때는 더 확실해졌고요!
취업하구 안정적인 형편이 되면 대학도 가구 그 꿈도 생각해볼려구요.
그때까진 꿈을 밀어 둘 꺼에요.ㅎ-ㅎ
만약 3학년 때 대학이 가고 싶어진다면 다시 바꾸면 되는 거구요~
여기까지 인 거 같아요. 제 꿈 이야기는!
선생님 맨날 말썽피워서 죄송하구요(__) 선생님 사랑해요♡'
(사실 똘비는 말썽 한 번 피운 적 없음!) 

'우리 똘비는 알까 모를까?
담탱이가 똘비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똘비도 선생님 사랑한다고 했네?
그냥 하는 말이라도 참 좋다!
정말이라고?
그럼 얼씨구나 좋고^^.

취업을 생각하면 꿈을 잠시 접어두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난 좋은 생각이라고 본다.
자신의 처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대학에 들어가려는 사람보다
실속 있게 취업을 먼저 하고
나중에 정말 그걸 하고 싶을 때
다시 도전해서 하게 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많을 거야.

사실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선진국에서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어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더 많단다. 
그러다가 정말 공부를 하고 싶거나
자신의 꿈을 업그레이드 하고 싶을 때
자신의 의지로 대학엘 가서 공부를 하는 거지.

그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 똘비도 진로를 잘 정한 셈이지.  
다만, 사육사가 되든 유치원 교사가 되든
가파른 현실 때문에 너의 꿈이 시들지 않도록
나의 꿈을 잘 간수하기 바래.
알았지?
오늘 여기서 줄일게.
좋은 꿈 꾸거라.'


'네~선생님두 안녕히주무세요ㅎㅎㅎ
내일봐요!!!!!!!!'

'내일 뵈요~
그랬는데 벌써 내일이다.
생일날 아파서 어쩌노?
오늘 학교에 오면 아이들에게 생일 축하 싸인 먼저 받고
오늘 내일 사이 생일시 써서
월요일에 함께 전해주마.
편지 안 보낸 녀석들 배가 많이 아프겠다, 그지?
주말 동안 몸 관리 잘하고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인데
끝마무리 잘 하도록 하거라.
그럼 이따 보자.
사랑하는 담탱이~'


아침에 똘비가 아파서 병원에 들렸다 온다고 문자를 보내왔지요. 빨리 보고 싶네요. 이상입니다. 밤새 녀석에게 편지 몇 줄 받았다고 들떠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못난 담임의 짝사랑 이야기 ^^^...

이상은 제가 '낭만교사'라는 닉네임으로 자주 소통하는 <교육공동체 벗>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생일축시는 다음 날 써서 아이에게 전해주었지요.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5년 남짓한 정년 등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본다면 제자에게 주는 마지막 생일시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썼지요.  

그동안 제자들에게 써 준 생일시가 어림잡아 850여 편. 제가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의 숫자와 비슷하지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생명의 가치에 비하면, 그리고 그들과의 소중한 인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안겨주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하기만 합니다.

지난달 학교 축제 행사 때는 우리 반 학생들과 제가 시와 편지로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지요. 생일을 앞둔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바탕으로 생일시를 쓰다보면 문학에 별 소질이 없어도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요.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한 번 확인해보시든지요. 똘비, 아니 솔비에게 써준 851번째 마지막 생일시입니다.    

솔비는 알까 모를까?

솔비라고 해도 예쁘고
똘비라고 해도 예쁘고
초생달 같은 얼굴을 더 예쁘고
배추 속잎처럼 여린듯하면서도
속이 꽉 찬 그 마음은  
그 중 가장 예쁘고.  

솔비는 알까 모를까?
담탱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오늘 편지 보니
똘비도 선생님 사랑한다고 썼는데 
그냥 하는 말이라도 좋고
그 거짓말이 참말이라면
얼씨구나 더 좋고^^.

유치원 교사가 되거나
사육사가 되고 싶은 것이
어릴 적 꿈이었는데
지금은 취업을 위해 
꿈을 잠시 접어두겠다고 했구나. 

남이 대학 가니까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철없고 바보 같은 짓이지.        
그보다는 우리 똘비처럼
똘똘한 자기 생각으로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 
백번이나 잘한 일이지.   

다만, 가끔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
가파른 현실 때문에
어릴 적 꿈이 시들지 않도록
네 마음의 샘물이
마르지 않도록.   

생일을 축하한다, 솔비야
너의 탄생을, 너의 새로운 시작을.

2010년 12월 20일
사랑하는 똘비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덧붙이는 글 | 내년 1월 8일 창립을 앞두고 있는 <교육공동체 벗>의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저는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cafe.daum.net/communebut


덧붙이는 글 내년 1월 8일 창립을 앞두고 있는 <교육공동체 벗>의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저는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cafe.daum.net/communebut
#순천효산고등학교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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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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