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와 딸을 만난 박용만

박용만과 그의 시대 55

등록 2011.01.05 11:59수정 2011.01.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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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2010년은 국치(國恥) 100년,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박용만은 마침내 하와이를 떠나게 된다. 독립운동의 역량을 다지기 위해 동포사회를 조직하고 또 무력항쟁을 위해 소년병학교와 국민군단을 창설해 14년 동안 분투를 멈추지 않았던 미주를 떠나게 된 것이다.

하와이 주둔군 미군 정보참모 커크우드 소령이 작성한 박용만 신상조사 보고서에는 다음 구절들이 나온다.

a  파손된 프로펠러를 수리 중인 미 육군 수송함 토마스호(호놀룰루 1916년)

파손된 프로펠러를 수리 중인 미 육군 수송함 토마스호(호놀룰루 1916년) ⓒ U.S.A.T(저작권해제)


"1925년 7월 박이 호놀룰루에 도착해(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연안 신문기자대회에 한인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북경에서 이동) 이민국 당국에 진술한 바에 의하면, 그는 1919년 5월 갑자기 육군 수송함 토마스호(1894년 건조, 1928년 폐선 됐음. 장교 1백 명, 사병 1200명의 수송능력을 가졌음)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고 했다. 그는 하와이령 주둔군 사령관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선편을 주선했고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통지하여 박이 그곳 미군에게 정보제공을 할 수 있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박은 또 주장하기를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미국의 시베리아 원정군 사령부를 찾아갔고 몇 달 동안 보수를 받지 않고 정보면의 자원봉사를 했다는 것이다."

a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 박도(사용허가)


박용만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게 된 건 시베리아 원정군 사령부를 찾아가는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처와 딸 동옥(東玉)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박용만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자취가 많은 곳이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올 때 그가 데리고 왔던 정양필의 부친은 정순만이었다. 정순만은 박용만과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그는 <대동공보>의 주필이었는데, 1911년 6월 동족끼리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또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은 당시 미주에 체류하면서 박용만이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개최했던 애국동지대표회의에 블라디보스토크 대표로 참석하려 했다. 그가 유럽에서 활동할 때 미주 쪽의 지원 인원을 주선한 사람도 박용만이었다. 


a  1백년 전 대동공보사가 있던 이 거리를 박용만은 자주 왕래했을 것이다.

1백년 전 대동공보사가 있던 이 거리를 박용만은 자주 왕래했을 것이다. ⓒ 박도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의 주필로 일했고, 1913년서부터는 호놀룰루에서 <국민보>의 주필을 맡았기 때문에 박용만은 원동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두 신문 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배포됐고 그 신문들의 총지국장을 맡고 있던 사람이 이용화였다.

그런 친분들 때문에 박용만은 처와 딸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딸의 교육을 이용화에게 부탁했다. 박용만의 가족을 보살피느라 드나들면서 이용화는 동옥에게 공부도 가르쳤다. 그러다 정이 들어 나이차가 좀 많은데도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1921년 딸을 낳아 영희라고 이름을 지었다. 산후에 건강을 잃은 동옥은 5~6년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더니 끝내 세상을 버리고 만다. 박용만의 처 역시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 병석에 누워 있었다.

a  박용만의 사위 이용화(1890-1980)

박용만의 사위 이용화(1890-1980) ⓒ 독립기념관


그녀는 딸과 함께 시름시름 앓다가 딸에 앞서 사망했다. 성품이 온화한 이용화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물론 북경으로 이주한 후에도 장모와 처의 장기간에 걸친 병수발을 감당했다.

이용화는 충북 음성 사람이다. 한말 원주 친위대 부관으로 있던 부친을 따라 원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프랑스 신부 피에르를 알게 돼 영어와 불어를 배울 수 있었다.  피에르 신부가 원산으로 전근되자 따라갔다. 거기서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과 안정근을 만나 서로 항일 의지를 다짐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용화는 21세의 나이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다. 합판공장 직공, 농촌의 야학지도원으로 활동하다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보스토카 인스트투트 대학 도서관 직원이 된 그는 1920년까지 근무했다. 일찍이 피에르 신부에게서 영어와 불어를 배웠기 때문에 노어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지 얼마 안 돼 러시아인 친구들도 많이 두게 됐다.

한 번은 러시아인 부호의 별장에 한 3개월 머문 적이 있다. 호화별장은 아니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스단께 지역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1920년. 전투를 앞두고 북로군정서 부대에서 무기를 구입하러 왔다. 그때 외딴 숲속의 별장을 아지트로 사용할 수 있었다. 북로군정서에서 파견한 조성환과 함께 그는 체코여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했다.

체코여단은 본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며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체코제 장총 한 자루를 10루불만 주면 살 수 있었다. 구입한 무기는 소총은 물론 기관총도 2정 있었다. 이용화는 김좌진과 이범석에게 소련제 외투와 가죽장화를 사 보내기도 했다.

해방 후 귀국한 이용화는 1990년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주는 서훈인 애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재혼해서 난 아들이 서훈을 신청할 때 박용만과 관계되는 사실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심사에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혼해서 난 딸에 의하면 이용화는 박용만에 대해 말할 때면 "아주 큰 어르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만약 박용만의 변절이 본질적인 그것이었다면 그가 죽은 다음에도 그렇게 부르면서 존경심을 갖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한편 박용만의 외손녀가 되는 이영희는 총명한 여성으로 성장했다. 중국어, 일어, 영어를 곧잘 했고 아버지의 사업을 잘 도왔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기도 했다.

중국인 사업가의 비서로 일하다가 한국전쟁 후 그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1년 박용만이 북경에서 결혼한 두 번째 부인 웅소청과 사이에 광원(光遠)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1992년 사망했다고 한다.

박용만이 암살당할 당시 5살이었고 69세에 죽었으니 그간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박용만의 후손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피를 이어 갔다는 얘기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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