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엔 '신용불량자'가 없다

[서평] 정치의 본질을 묻는 <대출 권하는 사회>

등록 2011.01.22 15:42수정 2011.01.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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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마니타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신용불량자는 없다. '신용불량자'라 낙인찍힌 사람들은 2004년 4월 말 382만5천 명이라는 최고 수치를 정점으로 그 해 말 통계에서 사라졌다. 당시 경제활동인구 2300만 명가량의 16퍼센트. 2004년 말 정부는 '신용불량자'라는 이름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로써 집계·관리는 전면 중단됐다. 그 이후로 우리 사회엔 '신용불량자'가 없다.


아니다. '신용불량자'는 있다. 지금도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쓰고 사채를 빌려 쓰고 빚을 갚지 못해 연체에 빠진 사람들은 수 없이 많다.

금융위원회 통계로도 이름을 달리 한 채무불이행자들은 무려 200여 만 명가량이나 된다. 그렇다면 신용불량자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용어가 사라졌고 사회에서 배제되면서 신용불량자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신용불량자 문제의 핵심에 신용카드가 있다. 보다 본질적으로 정부 정책이 있고 재벌카드사들의 과잉 경쟁이 있다. 정부 정책과 재벌카드사들 간의 무한 경쟁이 몰고 온 악풍이다. 서강대에서 '신자유주의시대 경제정책과 민주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은 현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순영 박사가 이 문제를 분석했다.

금융경제학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학적 잣대다. 민주화 이후 정부의 정책이 왜 경제관료에 의해 주도되었고, 어떻게 정부와 기업 간 지배연합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두 블록의 사이에서 결과적으로 신용불량자들이 희생되었음을 밝혀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민주주의 총서의 하나다.

잘못된 신용카드 정책이 신용불량자를 만들었다


2003년 한 해 동안 늘어난 신용불량자 108만 명 가운데 신용카드 관련 신용 불량자는 91만 명으로 신규 신용불량자의 84퍼센트를 차지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이 만들어 낸 제도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신용카드 정책은 신용불량자 급증 현상과 직결된다.

신용카드 비즈니스의 핵심은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부분이 아니다. 비즈니스의 핵심은 현금서비스다. 대출이다. 사실상 부대 업무라 할 수 있는 현금 대출이 신용카드의 핵심이 된 것이다. 1999년 4월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카드사 부대 업무 비율 규제(40퍼센트)가 폐지됐다. 1999년 5월엔 다시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 한도(월 70만 원)가 폐지되어 2000년 무렵에는 최고 한도가 월 1천만 원까지 증가했다.

그 결과 현금 서비스 이용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1997년만 하더라도 전체 카드 사용액의 47.1퍼센트였으나 2001년 60.45퍼센트로 크게 늘어났다. 여기에 카드론까지 포함할 경우 카드사의 현금 대출 서비스는 전체 이용의 70퍼센트를 훨씬 넘어선다. 현금 사용을 줄이자고 만든 신용카드가 오히려 현금 융통의 수단인 '대출 카드'로 변질돼 가계 대출을 늘렸고 결과적으로 연체가 늘어났고 종국에는 신용불량자 문제로 귀결됐다.

신용카드 발급에 있어서 '신용'은 기준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길거리에서 현금을 나눠주는 꼴이었다. 과거에는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발급되었던 신용카드가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가지면 가질수록 신용카드사들에게 이익이 되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백화점카드만 발행할 수 있었던 현대와 롯데가 2001년 본격 진출했고, 재벌계 카드사들인 삼성카드와 LG카드가 공격적 영업의 선봉에 섰다.

심지어 노숙인에게 까지 신용카드 발급을 남발했다. 신용카드사들은 높은 수수료와 연체료를 통해 충분히 폭리를 취할 수 있었고 연체에 대해서는 강박적 채권추심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구조였기에 발급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신용불량자가 되었을까? 사치와 과소비 탓이었을까? 앞서 통계를 들었지만 사치와 과소비에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는 신용판매(일시불 및 할부 구매) 사용액은 고작 20퍼센트 대에 머물렀다. 신용카드의 과다 사용은 한마디로 현금대출의 결과였다. 물론 현금을 대출받아 이를 사치와 과소비로 돌려 쓸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용카드 '과다 사용〓과소비'라는 등식은 매우 불완전한 것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IMF 직후 사회적 안전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량 실업은 소득을 급속도로 감소시켰다. 그럼에도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가계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카드를 카드로 돌려막았고 다시 카드깡을 하게 되고 마지막엔 사채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회복지 논쟁이 한창이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늘 '도덕적 해이론'이 존재한다. 신용불량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개인 탓이고, 개인 윤리 탓이고, 개인의 도덕적 해이 탓이다. 실제로 도덕적 해이 담론은 진보와 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신용 불량자 대책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정부가 엄청난 규모의 공적 자금을 기업과 금융기관을 회생시키는 데 사용했다는 사실에 견주어 보면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신용 불량자의 부채를 탕감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업의 운명은 정부의 개입으로 연명시키고 한 개인의 존엄과 경제적 운명은 철저히 방관한다. 진정한 도덕적 해이론이다.

신용불량자들은 누가 대표 하는가

정당제도가 저발달한 나라에서 눈 앞의 선거 승리라는 단기적 선호를 갖는 정치 엘리트는 장기적 시간이 요구되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다. 단기적 부양책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아가 정당 체제가 허약해 정당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결집되어 정책으로 산출되고 그런 정책 결정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민주적 정책 결정 구조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결국 이런 정책 결정 구조에서 단기적 선호를 갖는 집권 정치 엘리트와 성장주의적 경제 관료는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경제개혁의 대상이었던 기존의 재벌 기업을 동원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냈다.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관료 기구와 신용카드사들 간의 네트워크에 의한 연계는 신용카드 정책을 통해 정부와 재벌 기업 간 지배 연합의 형태로 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국가의 신용카드 정책과 재벌 기업이 중심이 된 신용카드사들 간의 공모가 없었다면, 그리하여 신용의 상품화를 통한 대출 시장의 폭발적 성장이 없었다면 소비자 개인은 과다 채무를 짊어질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임을 논증해냈다.

신용불량자들은 정부 정책과 카드사 경쟁의 희생양

신용불량자들은 지난 정부의 경제정책과 그에 대응한 신용카드사들의 과당 경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이다. 당시 재벌 신용카드사들이 이들의 미래 소득으로 연 1조 원에 가까운 초과이윤을 챙기는 동안 신용 불량자들은 벗어날 수 없는 빚으로 자살과 장기 매매, 범죄 사이에서 고뇌해야만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약 30여 명의 신용불량자들을 직접 면담했다. 그리고 이들의 살아있는 고통과 아픔들을 문장화 했다.

"잘사는 사람만 돈을 벌고 돈 없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해준 게 뭐가 있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 내일도 없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자식 낳지 말라고 말한다."

1억 가까이 채무를 연체하고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의 중년, 어느 50대 가장의 말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부 정책에 동원되어 자신의 미래 소득을 저당 잡히고, 자신이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에게 도덕적 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에서 그들을 복권시켜야 할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형사 사법에만 복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인권을 복권시키고 다 함께 공정한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대출 권하는 사회>는 정치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민주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덧붙이는 글 | <대출 권하는 사회> / 김순영 / 후마니타스 / 2011-01-03 / 1만3000원


덧붙이는 글 <대출 권하는 사회> / 김순영 / 후마니타스 / 2011-01-03 / 1만3000원

대출 권하는 사회 - 신용 불량자 문제를 통해서 본 신용의 상품화와 사회적 재난

김순영 지음,
후마니타스, 2011


#대출 권하는 사회 #김순영 #신용불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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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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