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13회)

숨겨진 기록 <2>

등록 2011.02.18 11:33수정 2011.02.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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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중화(中華)의 학자들이 자기네 학문이라고 주장한 <주역(周易)>이 첫머리에서부터 괴이쩍은 말을 쏟아놓는 게 심상했다.

<주역>의 본 이름은 '역(易)'으로 '바꾼다' 또는 '바뀐다'라는 의미다. 이름의 뜻은 세 가지로, 첫째가 '간역(簡易)' 둘째가 '변역(變易)' 셋째가 불역(不易)이다.


간역은 알기 쉽고 좇기 쉽고 평이하다는 것이며, 번역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뀐다는 뜻이며, 불역은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게 '역'에 대한 바른 지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역'을 일월설(日月說)이나 관측설로도 보기 때문이다. 일월설에선 해는 양을, 달은 음을 뜻하는 회의문자임을 내세운다. 관측설을 택한 건 일(日)을 물(勿)로 보는 관점 때문이다.

고대엔 '역(易)'이 세 가지였다. 첫째가 연산역(連山易), 둘째가 귀장역(歸藏易), 셋째가 주역(周易)이다.

세상에 알려지긴 연산씨는 신농씨의 별칭으로 이른바 신농씨 시대의 역이며, 귀장역은 황제 헌원씨 시대의 역이며, 주역은 주나라 문왕 때의 역이다.

유가경전의 뒷자리에 있던 <주역>이 어느새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역법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였으나 어느 사이 연산역과 귀장역은 사람들 눈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 이유가 뭔가? 왜 <주역>을 제외한 두 가지 역은 없어졌는가? 노감찰은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주(周)나라에 <홍범구주>가 전해질 당시 중화의 사가들이 율력(律曆)을 해득치 못해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미래를 점치는 무축이나 점술로만 활용된 거죠. 그러나 실제론 어떻습니까? <주역>은 역법(曆法)의 인통술(人統術)을 나타내는 인간사의 학문이니 만민을 다스리는 천자는 인간사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인통술을 배워야 했습니다.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팔괘, 천지의 기(氣)가 순환하는 것 등은 인간학에 속하는 문제인데 단순히 무축이나 점복으로 해설하려는 건 중대한 착오의 하납니다."

"허면, <주역>은 중화 사가들이 주장하는 저들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나라가 이륜(彛倫)으로 삼은 <홍범구주>는 동이족인 고조선 문화이고 그 안에 '율력'이 있었다.

중화인들은 율력을 깨우치지 못해 <주역>이 유가경전의 뒷자리에 밀려났다가, 공자가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읽은 후 인간학의 중대한 학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노감찰은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중화인들은 율력을 도외시한 채 단지 그들 나라에 오래 전부터 삼역(三易)이 있었다는 걸 주장했습니다. 주역 이전에 있었다는 신농씨와 황제의 역은 어디로 갔습니까. <홍범구주>가 전해진 건 주(周)나라 때니 삼역 중 두 가지 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저들은 율력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는커녕 그런 학문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주나라 문왕은 <홍범구주>를 고죽국에서 가져 온 기자(箕子)를 현인이라 했고 그것을 이륜으로 삼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죽서>에 기록했습니다."

"노감찰의 말은 삼역(三易) 중, 두 개가 없어지고 <주역>만 남았다는 지적인데···, 그렇다면 두 개의 역, 즉 신농씨의 역과 황제 헌원씨의 역은 어디로 갔는가?"

"두 역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중화인들은 <주역>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있는 것도 없다 했고 없는 것도 있다는 주장만 폈지 않습니까."

"으음."
"전한(前漢) 때의 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오행의 의(義)'를 주장한 사실이 있었고 후한 이후 맹강(孟康)이나 안사고 등이 인통술을 주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볼 때 <주역>을 인통술로 산출하는 방법이 제시된 것은 당송연간이란 점입니다."

정약용은 많은 학자들이 알고 있는 <주역>의 일반적인 부분을 건드렸다.

"저들 중화인이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주역>은 복희씨가 괘의 획을 만들고 문왕과 주공이 괘사를 만들었으며, 후대에 와서 공자가 이를 지어 전했다고 했네. 손질한 것은 한나라의 유흠을 비롯한 공안국이라 했고, 위나라의 관랑자와 소강절의 손질을 거쳐 당송 연간에 <주역>이 완성됐다는 점이네. 그렇다면 복희씨나 헌원이 만들었다는 역은 어떤 것인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있었다면 그것들이 어떤 병화를 입어 없어진 것인가?"

"시생의 생각엔···."
"생각엔?"

"고의로 없앴거나 처음부터 없었을 것입니다."
"흐음, 고의로 없앴다?"

"그렇습니다, 진(秦)나라 시대엔 정확한 세시기가 없어 달(月)이나 매삭(每朔)의 쓰임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진나라 이전엔 율력법의 연구나 사용이 없었다는 걸 뜻합니다. 나라 안에 도량형 제도가 없었다는 건 사마천의 <사기>에도 여실히 증명합니다."

중화인의 주장대로 <주역>은 하도낙서(河圖洛書)처럼 근원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천신이 거북이 등에 그런 숫자를 나타냈는가?

아니었다. 그런 걸 믿는 것은 일부 학자들 뿐이지 그들은 <주역>이 어떤 학문이며 근원이 뭔지도 몰라 유가경전의 뒷자리로 밀쳐버렸다.

"허면, 모방된 학문으로 보는가?"
"모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주역>이 저들 중화인의 학문도 아니고 모방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정전법(井田法)입니다."
"정전법?"

"예에, 정전법입니다. 동이족 문화인 정전법은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는 학문'입니다. 시행연도가 워낙 유구해 달리 기록으로 남겨 둘 충분한 이율 찾지 못해 중화의 사가들이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홍범문화는 조직적이다. 기자(箕子)가 아무리 현인이라 해도 단시일 내에 체득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율력같은 학문은 뒷전으로 밀려나 후한이나 당송의 성리학자에 의해 연구되어졌고, 그들에 의해 <주역>이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진 것처럼 조작됐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노감찰은 무더기를 이룬 죽간 더미에서 하나의 자료를 뽑아들었다. 그것은 주자(朱子)가 평가한 <노릉황서절부록(盧陵黃瑞節附錄)>이었다.

정약용은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철제함에 있던 죽간은 서한 왕조의 창업을 도운 장량이 세상에 전한 내용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눈을 치뜰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장량은 유방을 도와 서한 왕조를 세운 후, 자신이 배우고 익힌 <소서>를 물려줄 사람을 찾아 중원을 돌아다녔다고 했어. 지금도 <무경칠서>를 공부한 무인이면 누구나 욕심내는 일이지.'

온 천하를 방랑하며 인재를 찾아 나선 장량은 책을 전할 상대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비인외전(非人外傳)'이란 문구를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무슨 뜻인가? 남을 속이고 속이는 일에만 열중한 궤도술(詭道術)을 공부한 중원의 병략가에겐 <소서>를 전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쩡쩡대며 산다고 해서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갖 수단으로 재물을 모으고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궤도(詭道)만 아는 자에게 오래 전에 황석공이 그에게 내린 <소서>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제함은 그런 이유로 그의 관 속에 넣어져 송나라 때까지 내려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대업을 이뤄 서한 왕조 창업의 일등공신이 됐지만, 중원의 역사는 크게 내세울 수 없다는 점에 탄식했다. 동이족의 문화를 찬탈해 자기네 것인양 능치미를 떠는 사가들의 뻔뻔스러움에 절망한 것이다.

'중화의 역사는 순리적으로 대(代)를 이뤄온 게 아니고 짜깁기식 역사였다. 여기저기서 뚝뚝 따 왔기 때문에 '요순우문무왕은 전설'이라고 했다.'

자료실에서 두 해 전의 기록을 들척이던 서과가 방으로 들어서며 놀란 표정을 지은 건, 탁자 위의 죽간에 쓰인 낯익은 글귀 때문이었다.

"이것은 주자가 평가한 '절부록(節附錄)'이 아닙니까?"
"아느냐?"

"두해 전, 소인은 내의원에 소속된 약방의 여의였습니다. 소인이 명을 받고 내의원을 나서기 전, 괴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최직장(崔直長)이 며칠 째 등청하지 않아 그곳을 그만 두는 소인은 참봉 한 사람과 그 자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보름 전에 최직장은 표지가 찢긴 책자를 들고 판관 어른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어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판관이라면 품계가 한참 위다. 정약용의 되물음에 터져 나왔다.
"그게 '절부록'인가?"

"예에. 그 사실은 나중에 안 것이지만요. 최직장의 집은 도성 성벽 아래 동네였습니다. 한양을 둘러싼 민가 마을 중 가장 후미진 이유는 주위 집들이 벽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비가 오면 흐르는 빗물이 서까래를 타고 천정으로 들어오는 게 예사였습니다. 방안은 시꺼멓게 썩어 오죽했으면 귀신도 탁배기 한 잔 걸치길 싫어한다 했겠습니까."

"고약한 곳이로세."
"그렇습니다, 나으리. 소인이 최직장 집의  방 문을 열자 최직장은 모로 쓰러져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 날 식사를 거른 것으로 아는데 복부가 부어오른 걸 이상히 여겨 소인이 사체를 살펴나갔습니다."

"흐음, 먹은 게 없는데 배가 부어올랐다면···."
"건창(乾脹)이지요. 사체는 눈을 뜨고 있는 데다 눈동자가 돌출하고 입과 코 안에 맑은 핏물이 흐르고 피가 맺힌 얼굴은 검붉었습니다. 항문도 돌출한 데다 대소변으로 의복이 더럽혀져 있으니 이것은 누군가가 의복이나 젖은 종이로 최직장의 입과 코를 틀어막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주]
∎이륜(彛倫)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노릉황서절부록(盧陵黃瑞節附錄) ; 중화인들의 주장을 반박할 황제 헌원씨의 기록으로 주자가 주장했다.
∎건창(乾脹) ; 먹은 것이 없는데 배가 부어 오름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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