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클럽에서의 첫날밤

길 위의 날들

등록 2011.03.29 18:14수정 2011.03.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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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의 대학에 적을 두고 한 학기를 수학한 다음, 긴 여름방학을 맞았습니다. 도서관대신 길을 택했습니다. 120일간의 북미대륙 배낭여행길에 올랐지요. 길 위에서의 공부가 도서관에서의 공부보다 저를 더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2003년 4월 26일,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디트로이트를 떠났습니다. 그 버스 승객은 저를 제외하고 모두 흑인이었습니다.
 
a  길위의 시간

길위의 시간 ⓒ 이안수

길위의 시간 ⓒ 이안수

Flex?

 

석양을 받은 빌딩이 도시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때에 클리블랜드(Cleveland)에서 내렸습니다. 저의 첫 번째 난관은 숙소였습니다. 비싼 호텔이야 많았지만 저의 배낭여행 원칙은 유스호스텔과 대중교통만을 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낯선 도시에 어둠이 내리자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도시에 유스호스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막막한 상황이 되자 버스터미널 인근에서 만났던 두 젊은 청년이 알려준 플렉스(Flex)라는 곳이 생각났습니다. 여행 시작 첫날부터 '호텔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제 스스로 세운 이번 여행 룰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밤에 머물 수 있는, 그러나 호텔이 아닌 곳을 알려달라는 물음에 나온 대답이라 플렉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불분명했습니다. 주소를 들고 길을 물으면서 플렉스의 성격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한결같이 '가보면 안다'였습니다.

 

도심의 터미널 타워(Terminal Tower)에서 15분쯤 거리인 플렉스에 도착하자 과거의 화재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낡은 3층짜리 건물 1층에 아무 수식어 없이 'Flex'라는 작은 간판 만 횅하니 붙어있었습니다. 두려움이 뒷골을 타고 흘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거리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Terminal Tower에서 만났던 CASE(중부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여학생의 말이 등을 밀었다.

 

"이곳은 흑인이 많은 곳이라 밤이 되면 아주 위험해요. 이곳 다운타운뿐만 아니라 University Circle(유니버시티 서클)도 위험한 곳이라 학교 기숙사는 특히 안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고 있거든요."

 

문을 밀고 들어서자 '용무가 있는 자는 벨을 누르라'고 쓰여 있는 또 다른 문이 막아섰습니다.

 

벨 누르기를 망설이고 있는데 한 백인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여행자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가?"

"물론이다. 8시간에 14불만 지불하면 된다."

"숙박업소는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이곳은 어떤 곳인가?"

"헬스도하고 사우나도 하는 남성전용 시설이다"

"안전한가?"

"물론이다."

"주로 어떤 남자들이 이용하나?"

"운동하고 쉬고 싶은 남자들이 이용하지……."

 

아직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마음으로 그 남자에게 먼저 들어가도록 양보하고 그 뒤에서 체크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photo ID'였습니다. 아랫입술과 코에 뾰족한 삼각뿔 쇳덩이를 달아 피어싱을 한 젊은 친구의 목소리가 여전히 두렵기는 했지만 미시건 운전 면허증을 내밀면서 물었습니다.

 

"이곳을 소개하는 브로슈어 같은 게 있나?"

"미안하지만 없다."

"어떤 시설이 있나?"

"들어와서 살펴보아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게 가장 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Debit Card로 요금(One day pass 7$ + 8시간 체류비 14$=21$)을 지불하자 상호가 박힌 영수증까지 주는 것으로 보아 불법업소는 아닌 듯 싶었습니다.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쪽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더 큰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엽기적인 모습의 실내

 

a  플렉스 게시판에 붙은 이전 공고문. 이 공고문의 이미지만으로도 이 클럽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플렉스 게시판에 붙은 이전 공고문. 이 공고문의 이미지만으로도 이 클럽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 이안수

플렉스 게시판에 붙은 이전 공고문. 이 공고문의 이미지만으로도 이 클럽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 이안수

실내는 온통 검은색 일색이며, 조명은 턱없이 낮아서 거의 실내를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배정받은 107호의 싱글 룸은 지하에 있다고 했습니다.

 

좁은 계단은 내려서자 계단 벽은 온통 붉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고 공중전화 옆 게시판은 에이즈 예방을 홍보하는 게시물과 게이클럽 홍보물, 이 업소가 6월에 이전한다는 공고문이 벌거벗은 남자의 뒷모습에 프린터 되어 붙어 있었습니다.

 

지하로 들어서자 벌거벗은 몸을 흰 타월로만 감싼 엽기적인 모습의 건장한 남자들이,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낭을 멘 또 다른 엽기적인 모습의 여행자에게 일제히 시선을 주었습니다.

 

복도 끝에 있는 몇 대의 비디오 모니터에서는 남자들 간의 다양한 성행위가 담긴 하드코어 비디오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방 번호를 찾으려고 했지만 너무 어두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박박 머리 벌거숭이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대답대신 턱 끝을 치켜들었습니다. 그 남자방 맞은 편이었습니다. 바로 제방 앞에서 제방의 위치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어둡고 손이 떨려서 도어 키를 구멍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끈적끈적한 눈길의 박박 머리 남자가 등 뒤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만 앞섰습니다.

 

한참 만에 문을 열고 들어서서 불을 켜자 침상 위의 비닐매트리스와 사방의 벽, 천장까지도 오통 검은색이었다. 공중에 달린 조도가 낮은 백열등에 들어난 쪽방의 풍경은 그로테스크 그 자체였습니다. Linens(Bath Towel, Pillow Case, Bed Sheet)와 검은 플라스틱 재떨이, 쓰레기용 작은 종이봉투, 그리고 검은 포장의 콘돔 하나가 방안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a  제 배낭을 제외하고 사진에 보이는 것이 모두인 1인용 쪽방.

제 배낭을 제외하고 사진에 보이는 것이 모두인 1인용 쪽방. ⓒ 이안수

제 배낭을 제외하고 사진에 보이는 것이 모두인 1인용 쪽방. ⓒ 이안수

 

열린 문을 닫았습니다. 복도에서 흰 타월만 걸친 채 서성이는 남자들이 금방 문을 열고 들어 설 것만 같았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문의 잠금장치를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다시 문을 열고 도어 손잡이를 돌려보니 밖에서는 돌려지지 않았습니다. 방밖의 벌거숭이 남자들은 박박 머리가 아니면 아주 짧은 머리 스타일에 하나 같이 팔이나 등에 갖은 문신을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따고 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공간

 

a  벽 곳곳에 설치된 비디오 모니터. 여성용 클럽이 아닌 이곳에서 남성 동성애의 하드코어비디오물만 상영됩니다.

벽 곳곳에 설치된 비디오 모니터. 여성용 클럽이 아닌 이곳에서 남성 동성애의 하드코어비디오물만 상영됩니다. ⓒ 이안수

벽 곳곳에 설치된 비디오 모니터. 여성용 클럽이 아닌 이곳에서 남성 동성애의 하드코어비디오물만 상영됩니다. ⓒ 이안수

하지만 이곳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더욱 두려울 것만 같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다시 문을 열고 나섰습니다. 지하에는 whirlpool 욕조와 사우나, 사워시설과 함께 1인용 쪽방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벽 곳곳에 설치된 비디오 모니터에서는 끊임없이 남성들만의 자극적인 자위행위와 성행위만이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간혹은 방문을 열어놓고 벌거벗은 채로 천천히 자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쇠사슬 그네만이 교수대 밧줄처럼 늘어져있는 구석진 Dungeon의 어둠 넘어에서도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1층 로비에는 A&U 등 Aids 관련 잡지와 outlook, pose, outlines, GAY PEOPLE'S Chronicle 등 남성 동성애 잡지들이 비치되어 있다. 판매용 진열대에는 6인치에서 8인치까지의 각종 남성 성기 모형들이 남성용향수와 다양한 종류의 lubricant 등과 함께 8$라는 가격표 달고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Deluxe Single들이 자리 잡고 있는 1층 안쪽의 벽에 이 집의 정체를 완곡하게 규명하는 'Men's Membership only Bath House'라는 문구가 붙어있었습니다. 2층에는 Double 룸들이 배치되어 있고 한곳에는 헬스기구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두루 순례를 하는 동안 모두가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볼 뿐, 어느 누구도 말을 걸거나 유혹의 몸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팝음악만이 지배하는 이 집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몸만으로도 충분히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공간인 듯했습니다. 대부분은 박박 머리에 체격이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간혹은 노인 축에 가까운 분이나 어리게 보이는 왜소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어쩐지 이곳 남자들이 단순하고 순박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순례를 마치자 처음의 두려운 마음이 어느 정도 가셨습니다. 1층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도 샤워를 안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옷을 벗고 타월을 허리에 두르고 방을 나서자 제가 두려워했던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Whirlpool과 사우나 곳곳에는 Malicious Mischief(고의적인 기물파손), Vandalism(만행), Scat(arousal with feces 변을 사용한 성적 자극), Water Sports(arousal with urines 소변을 사용한 성적 자극)를 경고하는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위반자는 즉시 회원자격이 영구히 박탈되고, 엄마에게 통보되며, 다른 회원들에게 개인 정보가 공유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워에 Whirlpool Bath, 사우나까지 돌고 나니 이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피로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좁고 검은색의 쪽방이 불편했지만 사고무탁(四顧無託)의 이곳 도심에서 밤이슬을 피하게 해준 이곳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역겨운 비디오와 계속되는 팝음악, 음침한 조명, Dungeon에서의 신음소리, 방문을 열어놓고 자신의 성기를 부여잡고 있는 녀석의 시선, 끊임없이 피워대는 대마초 냄새 등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잠자기를 포기하고 다음날 다시 클리블랜드의 길 위로 나왔습니다. 아무 신체적 손상 없이 그 플렉스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태양이 더욱 눈부셔보였습니다.

 

길 위의 날들

 

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멀리 Guyahoga River('꾸불꾸불하다'는 인디언 말에서 비롯된)를 가로질러 놓인 다리 너머로 한 무리의 건각들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시에서 주최한 마라톤이었습니다. 젊은 처녀로부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까지, 깡마른 중년 부인부터 육중한 몸매의 아저씨까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화창한 날씨 속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연도의 시민들은 하나같이 박수와 환호 그리고 다양한 구호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Good job, Guys!(잘한다, 친구들!)"

"Hurrah! Almost there!(야호!, 거의 다왔어!)"

 

a  클리블랜드의 대로를 달리고 있는 건각들

클리블랜드의 대로를 달리고 있는 건각들 ⓒ 이안수

클리블랜드의 대로를 달리고 있는 건각들 ⓒ 이안수

내 옆을 스치고 있는 그 마라토너들을 보면서 나는 결심했습니다.

 

"지난밤의 두려움이 결코 내 앞에 놓인 119일간의 여행의 날들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어."

"Hurrah! Good job!(야호, 잘한다!)"

 

저는 기진한 표정으로 달리고 있는 마라토너뿐만 아니라 제 앞에서 저를 가로막고 있을 예상되는 수많은 난관들에 소침해진 저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저는 그 후 대중교통과 히치하이크만으로 4개월에 걸친 미국과 캐나다의 독립여행을 마쳤습니다. 승용차와 봉고차, 경찰순찰차와 달구지, 거룻배와 요트를 히치하이크를 했고, 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의 집과 대학기숙사, 집 마당의 캠핑트레일러와 택시회사 사무실 등에서 숙식을 제공받았습니다.

 

a  버기를 히치하이크했습니다.

버기를 히치하이크했습니다. ⓒ 이안수

버기를 히치하이크했습니다. ⓒ 이안수

a  요트에서 반나절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사람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요트에서 반나절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사람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 이안수

요트에서 반나절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사람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 이안수

a  요트에서 반나절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사람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요트에서 반나절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사람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 이안수

요트에서 반나절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사람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 이안수

클리블랜드 플렉스 동성애자클럽의 신음소리 가득한 곳에서의 하룻밤 경험은 길 위 어느 곳에서나 더 이상 저를 두렵게 하지 않았습니다.

 

래브라도의 어둠이 내리는 산길에서 히치하이크에 실패하고 야생곰과 하룻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뉴펀들랜드의 소나기가 오락가락하는 삼나무숲 길에서 여우들이 저를 둘러싸고 포효하는 동안에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여행으로 좀 더 너그러워진 태도로 세상에 임할 수 있게 되었고, 소유하는 것에 덜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길섶의 풀 한포기도 제 코끝을 스치는 바람도 제게 더욱 특별해졌고, 사람들의 모진 모습이 아니라 어진 모습이 더 크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정주 선생님은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현재의 저를 만든 것은 팔할이 길 위의 날들입니다. 모티프원에 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에 도달하기위해 제 인생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요?"

 

저는 요약해서 답합니다.

 

"성공은 '행복'의 다른 이름 이어야 한다. 인생은 바로 그 행복을 굽는 행위이다. 도전, 노력, 인내, 배려, 검소, 관용, 사랑이라는 유기농 재료들로……."

 

진짜 링은 인생이더라

 

일전에 식물감각의 마숙현 대표님과 와인을 한잔 했습니다. 마 선생님은 와인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시곤 하는 저의 이웃입니다. 저는 와인향에 취해 마라톤 얘기를 꺼냈습니다. 사실 마 선생님은 지금도 수시로 마라톤의 풀코스를 소화하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10여km를 달리는 분입니다.

 

"마라톤이야말로 인생을 닮은 것 같습니다?"

 

저의 상식적인 질문에 마 선생님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마라톤보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저는 언제든지, 몇 번이라도 즐겁게 달릴 수 있어요. 하지만 인생은 어느 한 토막도 마라톤보다 숨차지 않는 것이 없어요."

 

현재의 안정된 식물감각은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마 선생님 부부의 인내를 실험했습니다.

 

a  마대표님과의 와인 두병, 그리고 인생 한 모금.

마대표님과의 와인 두병, 그리고 인생 한 모금. ⓒ 이안수

마대표님과의 와인 두병, 그리고 인생 한 모금. ⓒ 이안수

최근 홍수환 선수께서 한 매체와 인터뷰를 했더군요. 그동안 제게도 잊혔던 인물인데 그분의 등장은 1977년 파나마에서 네 번 다운되고도 KO승을 거두었던 카리스키야와의 경기를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습니다. 

 

환갑을 맞은 그분의 링 밖 인생도 파란이 많았더군요.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맨 모습이었지만 벽에 등을 기대고 종결어미를 다양하게 바꾸어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인생에 대해 말했습니다. 링 아래에서 굽이가 많은 길을 지나왔음인지 그의 말에서 페이소스가 느껴졌습니다.

 

"세계 참피언이 됐지만 진짜 링은 인생이더라. 정말 링보다 인생이 무섭더라."

 

상대의 주먹이 사정없이 작열하는 36평방미터의 링 위에서보다 링 바깥에서의 삶을 더욱 경외하게 된 태도가 반영된 다양한 그분의 다양한 흔적들이 보였습니다.

 

"관훈

선-인간 참피온

후-복싱 참피온"

 

그분이 관장인 '스타복싱체육관'의 관훈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팬들의 사인 요청이 있으면 '챔피언'이 아니라 '참피온'이라고 쓴다고 했습니다. '참고, 피하고, 온수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답니다.

 

a  경찰과 대치중인 범죄 혐의자. 인생길에는 고개를 떨구어야 할 일도 있기 마련이다.

경찰과 대치중인 범죄 혐의자. 인생길에는 고개를 떨구어야 할 일도 있기 마련이다. ⓒ 이안수

경찰과 대치중인 범죄 혐의자. 인생길에는 고개를 떨구어야 할 일도 있기 마련이다. ⓒ 이안수

사실, 인생이 모든 스포츠와 다른 것은 '시간'일 것입니다. 인생은 마라톤코스보다 길고, 복싱의 라운드보다 훨씬 긴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달리고 있는 마라토너처럼, 링위의 복서처럼 밀도 있게 그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도 마라토너가 가쁜 숨을 견디는 만큼이나 어렵고, 소유와 집착을 버리는 것도 링위의 복서가 상대의 펀치를 견디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가 휘청거릴 때 홍수환을 챔피언으로 만든 김준호 트레이너가 홍수환에게 했던 말을 외쳐야 합니다.

 

"Just One More Round!(1회전만 더)"

 

플렉스에서의 악몽 때문에 제 발길을 대학의 기숙사로 되돌렸다면 제 삶이 지향하는 방향을 바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제 현재의 삶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포기하고 싶어할 때가 오기 전에 스스로에게 외칠 필요가 있습니다.

 

"Hurrah! Good job!(야호,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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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북미여행 #동성애클럽 #클리블랜드 #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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