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가 원하는 '노태우'에게 붓 뚜껑을 꾹 눌렀다

[연재소설]미래는 남은자들의 유서이다(37)

등록 2011.05.09 11:48수정 2011.05.0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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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2.


<입영전야>를 불러주겠다던 삼촌은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훈련소에 입소하던 날 아침이었다. 송별주를 사겠다더니 어찌된 일이냐며, 통화했을 때였다. 배가 아파서 꼼짝 할 수 없다던 그는 횡설수설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했다. 그에게 훈련소는 '상무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 첫 휴가 때 두 배로 갚아!

잘 갔다 오겠다고 안심시켰지만, 나 역시 긴장하여 말을 더듬었다.  

훈병 박 등하! 시정 하겠슴다! 특정된 개인이라는 관념은, 가장 먼저 교정해야 할 오류였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폭력적 중압감. 개인의 왜소함.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저항할 수 없는 기간. 그저 참는 것. 폭력에 고개 숙이는 것. 그것을 신봉하는 것. 지질한 권력이라도 휘두르는 것. 입대하는 후배에게 들려준 경험자들의 충고는 이것이었다.

대학 다니다 왔다고 수도권의 보병부대에 배치되었다. 더블 백을 메고 행정내무반에 도착했을 때였다. 금테 안경을 쓴 말년 행정병이, "너 일병 달기 전에 제대다"며,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나를 내무반으로 데려갔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가니까, 중대장전입신고를 할 때까지 꼼짝 말라고 지시하고 간 후였다.


나는 침상 끝에 두 팔을 쭉 뻗은 채 무릎을 모으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도의 긴장과 의기소침함, 두려움으로 고개조차 돌리기 힘들었다.

- 이 새끼 뭐야? 

누군가가 툴툴거리며 내무반으로 쑥 들어오더니 탁! 내뱉었다.

- 넷! 이병 박 등하!
- 너 이 새끼, 데모하다 왔지!

그 순간 숨이 헉, 막혔다.

- 아닙니다!
- 그럼 새꺄, 돌 던지다 왔어?

그는 대학생들은 모두 빨갱이라고 확신하던 선임하사였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그는 나와 두 살 차이였다.

- 아닙니다. 공부했습니다!

- 공부만 하던 새끼가 왜 여기 와! 군대가 공부하는 덴 줄 알아?

나는 훈련소에서부터 거대한 전일적 폭력구조에 가위 눌려 있었다.

그런 거 왜 묻느냐고, 데모하고 짱돌을 던지다 온 것과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무슨 연관 있느냐고 되묻는 것은, 맞아 죽으려고 용틀임하는 짓이었다. 아니면 신성한 군대에 침투한 빨갱이로 몰려 즉시 보안대로 보내졌을 것이다.

군대생활 잘 하려면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민주주의나 정의, 자유, 평등의 가치는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인정해야 했다. 강요하거나 설득해서가 아니라, 비굴하게도 내 스스로 알아서 그런 가치관을 부인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살자. 그것만이 온전히 육신을 보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강제 징집된 선배들 여러 명이 군대에서 의문사 당한 후였다. 나 같은 전력자들은 언제 보안부대에서 호출할지 몰라 늘 긴장했다. 공안기관에 연행된 학생운동 동기나 선후배들 중 누구로부터 언제 어디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운동 그만두었다고, 그래서 자원입대하여 군대 온 것 아니냐고 말하면, 그들은 조용히 몽둥이부터 휘두를 것이다. 불구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맞아죽는다 해도 그만이었다. 사고사나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날 것이고, 서둘러 화장처리 될 것이다.

민주주의와 군대는 서로를 적대했다. 그곳에서 정의란 물리적 폭력의 다른 표현이었고, 자유란 특권과 특혜에 비례했으며, 평등이란 오로지 부하들의 숫자로 결정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깨우쳐야 할 가치였을까. 국가가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세금을 퍼부어가며 가르칠 만한 내용이던가.

일병 단 지 일주일쯤 지난 후 취침점호가 끝난 밤 11시였다. 군기가 빠졌다고, 후임 병들 통제 못했다고 동기들과 화장실 뒤로 불려나갔다.

그 막막한 두려움. 내 표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가. 아니면 공포에 찌들고 고통에 몸서리치며, 선처를 기대하는 비굴한 표정이었을까.

곡괭이 자루로 십 여 대를 맞은 후였다. 군대 좆같지? 때린 선임 병이 사제(私製) 담배를 돌렸다. 그걸 입에 물고, "괜찮습니다." 낮게 복창했던 그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깊은 밤 두 살 어린 선임 병이 담요를 파고들어 성기를 만졌을 때였다. 처음에는 잠결의 무의식적 행동인 줄 알았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성폭력은 노골적이었다.

팬티 속으로 손이 들어올 때의 모멸감. 토할 것 같은 불결함. 증오. 참지 못해 결국 소리를 질렀다.

- 이게 뭐하는 겁니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신병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는 졸린 눈으로 무슨 일이냐며, 오히려 내가 잠꼬대한다고 몰아세웠다.

다음날 아침 점호가 끝난 뒤였다. 관물함 정돈이 엉망이라고 트집 잡던 그는 결국 주먹을 휘둘렀다. 지난 밤 무안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몇 대를 맞은 후 주먹을 막아섰다. 그러자 구경하고 있던 다른 선임 병의 군홧발이 날아왔다.

- 완전히 당나라 군대구만!

명령불복종. 계급이 높은 자의 모든 행동은 포괄적으로 용인되었다. 선임의 행동은 무조건 정당했다. 그는 더 높은 자에게 같은 꼴을 당했을 것이고, 그 자는 더 높은 자에게 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올라가 보면 군 통수권자가 늙은 국방장관의 팬티에 손을 넣었던 것이다. 전시에 명령불복종은 사형이었다.

나는 밤마다 선임 병 두 명에게 불려나가 사흘간 두들겨 맞았다.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하는 것.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그것만이 미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출근하는 중대장의 기분에 따라, 1백50여 명이 웃었다 울었다 했다.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언제든 팬티 내릴 마음 자세를 갖는 곳. 거기가 군대였다.

군부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와 저항이 광범위해질수록 직업군인들은 더욱 사나워졌다. 아부쟁이 언론은 대학을 점거한 폭도들의 극렬시위로 나라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발광했다. 오로지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빨갱이'였다.

대학생과 빨갱이는 동의어이며,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는 정신교육이 매일 같이 반복되었다.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 그리고 적화통일.

뉴스와 특집을 통해 시위현장의 폭력적 장면들이 반복될 때마다 곳곳에서 섬뜩한 저주가 터져 나왔다.

- 저 빨갱이, 개 새끼들. 다 쏴 죽여야 해!
- 우리 부대가 출동해 봐라. 광주사태? 그게 천국이었다는 걸 보여줄거야, 개새끼들.

직업군인들의 증오심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무지만이 가장 투철한 애국심이었다. 결정하고 창조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저들만의 특권이었다.

수도권에 위치했던 우리 부대에서는 무성한 소문들이 굴러다녔다. 유사시 서울 출동이었다. 그건 군부정권을 연장하는 친위쿠데타를 의미했다. 정보를 다루는 장교들의 태도도 그럴 가능성을 시사했다.

- 공수부대는 이번에 뒤로 빠질 거다. 광주사태 때 너무 많이 죽여서 여단장들이 절대 출동 안 하겠다고 한다더라.
- 인마.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게 군댄데, 그게 말이 돼?
- 전두환이 그 새끼들한테 투자한 게 얼만데. 

군대동기들과 토요일 오후 휴게실에 모였을 때였다. 모두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동기들은 모두 서울 출신이었다.

자칫하면 시내에서 동네친구들과 총격전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낭패감, 혹시나 부대원 중 누군가가 형이나 동생을 죽이는 걸 목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심란했다.

그럼 어떻게 하냐? 그 새끼한테 복수해야 되잖아!
- 그러다 니가 죽으면?
- 와, 군대 좆같다! 정말.

다행히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민항쟁에 밀린 군부가 어쩔 수 없이 권력을 갱신하는 방법을 바꾸었던 것이다. 군부쿠데타를 다시 승인하기 부담스러웠던 미국이 압력을 넣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번에도 군부는 광화문 대로에서, 부산 역 앞에서, 교동네거리에서, 주안 역에서, 다시 한 번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 할 수 있었을까.

반정부투쟁으로 단련되고 조직된 수만 명의 대학생들,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십만 명의 시민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을 텐데. 시민들에게 또 다시 총질하고도 권력을 갱신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까.

1905년 전함 포템킨에서 일어났던 수병 봉기처럼, 사병들은 불법적인 발포명령을 그대로 수행했을까. 총구를 명령권자를 향해 되돌리지 않으리라 그들은 확신했을까.

총과 탱크로 권력을 탈취했던 자들이 국가조직과 돈과 기획된 폭력으로 표를 모으고 있을 때, 나는 제대 말년이 되어 있었다.

그해 말에 난생 처음 경험해 본 대통령선거는, 직업군인들이 얼마나 허섭스레기 같은 자들인지 확인시켜 준 피날레였다. 그들은 1백 퍼센트가 아니라 1백2십 퍼센트의 찬성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형식상으로 만들어진 행정반 안 기표소 앞에는 붓 뚜껑과 인주, 그리고 중대장이 부재자투표함 위에 앉아 있었다. 커튼은 어디에 있었지? 화장실에 설치되어 있었던가?

대통령선거란 중대장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보여 줄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전남 바닷가가 고향이었던 그는 삼군사관학교라는 '비루한 천골' 출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투표용지를 개봉해 노태우한테 일률적으로 두 번씩 찍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처럼 대범하지도 못했다. 대신 사병들은 모두 그의 앞에서 투표해야 했다.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면 그 자리에서 투표용지를 찢어 버리겠다고 공언한 후였다. 

- 박 등하. 너 인마, 군장은 싸 놓았지?

요주의 사병으로 찍혀있던 내가 봉투에서 투표용지를 꺼내자 그가 선수를 쳤다. 

- 에이, 중대장님. 노태우 찍으면 안 됩니까?

나는 그가 원하는 번호에 붓 뚜껑을 꾹 누르며 대꾸했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하라는 말년이었다. 제대를 앞두고 꼬투리 잡혀 군장 멘 채 한겨울 연병장을 기어 다니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나의 비굴함에 힘입어 쿠데타를 함께 작당했던 자는 대통령이 되었고, 군부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갱신했다. 
#광주항쟁 #친위쿠데타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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