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묻은 고엽제, 미군에 책임물을 길 없다

책임여부 미군 사령관이 판단... "불평등한 소파 개정해야"

등록 2011.05.20 20:11수정 2011.05.20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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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미군이 1978년 고엽제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기지에 대량매립했다는 미군 전역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20일 오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기지 정문에서 미군 군무원이 촬영을 제지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1978년 고엽제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기지에 대량매립했다는 미군 전역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20일 오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기지 정문에서 미군 군무원이 촬영을 제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978년 주한미군이 경북 왜관 미군기지(캠프 캐럴)에 몰래 묻었다는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만일 사실로 밝혀진다면 주한미군 관련 환경오염 사례중 최악의 오염사고가 될 전망이다.

그럼 그 피해는 누가 책임져야 할까.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원인을 제공한 미군이 져야겠지만, 그리 간단치 않다.

"가장 끔찍한 토양오염사고로 기록될 것"

에이전트 오렌지에 함유된 다이옥신은 인간이 만든 물질 중 가장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로 청산가리보다 1만 배나 더 독성이 강하다. 무색·무취의 다이옥신은 물에 녹지 않고 지방에 흡착돼 인체와 환경에 오래도록 잔류한다.

게다가 잘 분해되지 않아 다음 세대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고엽제 피해자 2세들은 척추이분증, 말초신경병, 하지마비 등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은 림프암, 육종암, 폐암, 후두암, 백혈병 등 15종을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정하고 있다.

녹색연합은 고엽제 매몰 보도가 나온 직후 성명을 내고 "고엽제를 매립한 금속이 부식돼 토양과 지하수를 오염시켰을 수 있다. 직선거리로 630m 떨어진 낙동강과 인근 농경지 농작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인근 지하수 및 주민건강영향 조사를 조속히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이번 사건은 정부가 토양과 지하수를 법으로 관리한 이래 가장 끔찍한 토양오염사고로 기록될 것"이라며 "오염의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경우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정화사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녹색연합의 지적대로 고엽제가 매몰된 후 33년이 지나면서 철제 드럼통은 부식되어 내용물이 토양이나 지하수로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캠프 캐럴은 낙동강 본류로부터 채 1㎞도 떨어져 있지 않아 장기간 낙동강을 상수원으로 하는 주민들의 체내에 다이옥신이 축적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환경오염 사고의 특성상 다이옥신으로 인한 질병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염 원인자 부담 원칙', 주한미군에겐 먼 이야기

a  사진은 20일 오후 캠프 캐럴 기지 내부의 모습.

사진은 20일 오후 캠프 캐럴 기지 내부의 모습. ⓒ 연합뉴스


오염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가 오염 방지 및 제거 비용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는 '오염 원인자 부담 원칙'에 따라 주한미군이 환경 정화와 복구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환경 관련 국제문서, 조약, 대부분 국가들의 국내 환경 정책 및 환경규정 등에서 오염 비용 부담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채택되고 있다.

그런데, 한미 양국 간에 체결된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를 들여다보면 문제 해결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 1966년에 체결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는 환경보호에 대한 조항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2000년 매향리 오폭 사고와 한강 독극물 방류 사건을 계기로 미군 기지에 대한 환경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국민들의 날선 비판에 직면한 정부는 미국과 SOFA 개정 협상을 벌여 환경조항을 신설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염된 환경의 치유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주한미군 측은 환경치유의 기준으로 해외주둔 미군기지에 적용되는 미 국방부 내부 지침인 'KISE' 기준을 주장하고 있다.

KISE란 '인간 건강에 대한 공지의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Known, Imminent and Substantial Endangerment)을 뜻하는 영문 약자로, KISE에 해당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한미공동조사절차와 치유원칙을 따르지만, 향후 기지반환에 따른 환경오염사안들은 소파규정에 따라 미국이 원상회복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미군 측 주장이다. 즉 미군은 '이미 널리 알려진 급박하고 실질적인 환경오염'만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외 주둔 미군의 공통 지침이라는 이 KISE의 구체적 개념이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또 있다. 반환 미군 기지의 환경오염 정도가 KISE에 해당하는지, 해당하지 않는지를 주한미군 사령관이 재량껏 판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유영재 미군문제팀장은 20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고엽제 후유증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면 이번 사건이 KISE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미군이 인정할지는 모르겠다. 미군도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엽제를 몰래 묻은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만약 이번의 경우도 미군이 KISE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국민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유 팀장은 또 "소파 환경규정도 실질적으로 미군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겉껍데기에 불과하다"며 "이런 불평등한 소파협정은 당연히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리핀 기지 정화비용 10년 넘게 지불 거부

미군의 환경오염과 그 피해보상과 관련해서 필리핀의 경우는 우리가 주목할 만하다.

필리핀 주둔 미군이 철수한 이후, 미군이 사용하던 클라크 공군 기지와 수빅만 해군 기지에는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두 기지에서 미군 주둔 당시 오염된 지하수를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던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피해는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져 기지 거주 어린이들에게선 평균을 훨씬 뛰어 넘는 백혈병, 소아마비 환자가 속출했다.

지난 2000년 피해 주민 중 일부가 미국을 상대로 기지의 오염제거와 주민들의 피해보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주민들은 소장에서 "미군이 수십년간 기지를 사용하면서 땅에 파묻은 방사능 폐기물, 불발 포탄, 유독성 폐기물로 토양과 물이 오염됐다"면서 "이로 인해 1996년 이후 어린이 등 100여명이 사망했고 300여명이 오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껏 필리핀 정부와 맺은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복구의무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10년 넘게 기지 정화 비용의 지불을 거부하고 있다. 허술한 환경 규정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한미군의 캠프 캐럴 고엽제 매몰 사건을 계기로 정부 당국의 철저한 진상조사, 책임 소재의 규명과 아울러, 차제에 전국의 주한미군 기지에 대한 환경 실태조사와 함께 한미 간에 체결된 불합리한 환경 관련 규정 개정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KISE #고엽제 매립 #SO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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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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