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서울대 총장인데, 너무 치졸하십니다

서울대 법인화 반대 점거농성, 학교당국의 치사함을 고발합니다

등록 2011.06.05 14:08수정 2011.06.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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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법인화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5월 3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대학본부 건물 현관에 법인화 설립 준비위원회 해체를 주장하며 '들어올땐 국립대였지만 졸업할땐 아니란다'라고 적힌 종이를 붙이고 있다. ⓒ 유성호


작년 12월 날치기로 통과된 서울대 법인화 법안에 반대하고, 그 날치기 법안을 쫓아 허둥지둥 만들었던 서울대 법인화 설립추진위원회를 해체하라는 학생들의 서울대 본부 점거가 6월 4일, 오늘로 6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점거 5일째 되는 어제, 총장님께서 점거 중인 본부에 잠시 행차하셨지만 "오늘은 상견회 정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자", "그래, 요구사항이 뭐냐"와 같은 말씀만 하시다가 1시간을 조금 넘겨서 돌아가셨습니다.

2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하고, 그 총회의 결정으로 점거를 시작했는데 5일이 넘도록 "요구사항"도 확인하지 않으셨다니, 그렇게 바쁘신지요?

점거 때문에 근로장학금, 청소노동자 임금을 못 주신다구요?

그런데 다른 쪽을 보니 꼭 바쁘셔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우 주도면밀하게 학생의 점거를 매도하려고 포석을 깔아놓으신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것도 매우 고전적인 수법으로 말입니다.

노동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파업을 하면 늘 정부와 사측은, 이 파업으로 국가 경제에 얼마큼의 손해가 생기고 국민들의 불편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떠들어댑니다. 그렇게 걱정되면 파업까지 가기 전에 적극 협상을 하셨어야 하는데, 그때까지는 손 놓고 있다가 파업이 시작되면 대대적으로 언론공세를 하시죠. 지하철 파업을 하면 TV에는 출근시간을 놓쳐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늘 등장합니다.

6월 2일 낮 12시 36분. 서울대 구성원들 전체에게 메일이 돌았습니다. 5월 30일 밤 11시쯤 점거가 시작되었으니 채 이틀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행정관 건물 점거 사태로 인하며 (줄임) 신입생 맞춤형 장학금, 근로장학금 등 장학 업무, 시간강사 선생님들에 대한 강사료, 일용직원들에 대한 급여, 국제학술대회의 참가경비 등의 지급 업무가 수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줄임) 모든 자료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이오니 이점 또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줄임) 본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조만간 긴급 대책반을 마련할 예정입니다만, 여건상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여러분의 많은 이해를 바랍니다."


학생들이 학교 본부와 싸울 때, 본부 점거는 최후의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학교 당국은 업무 마비로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점거를 풀라고 종용했지요. 저도 메일을 받고 뻔한 레퍼토리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생각하며 억장을 무너지게 만들었던 것은 메일 마지막에 붙은 리스트였습니다.

학생 장학금 미지급
- 신입생 맞춤형 장학금 151명 3억1천만 원
- 근로장학금 1120명 2억8천만 원
시간 강사료 미지급 1437명 9억9천만 원
일용직 인건비 미지급 (예, 버스기사 12명 2천4백만 원)
청소, 경비 용역비 지급 불가 8천만 원

학생들이 점거농성을 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생활비 벌기 위해 일한 돈, 시간강사로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 강의한 선생님들 월급, 새벽에 나오셔서 청소하시는 노동자분들의 월급 주기 어렵다면서 협박하는 거 아닙니까? 메일의 제목이 "친애하는 서울대 가족 여러분"이었는데, 그 "친애"라는 글자가 참 간사하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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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법인화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5월 3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대학본부 건물에 위치한 총장실을 점거한 채, 다음주 예고된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서울대 학생들, 생각보다 얌전하고 똑똑합니다

보통 학교 본부 점거농성을 하면 내부의 집기를 들어냅니다. 그렇게 업무에 타격을 가해서 거대한 학교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학생들, 얌전하게 복도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이 잠겨 있는 각 사무실 내부는 그대로 있습니다. 직원들이 필수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출입한다고 하면 막지도 않습니다.

실제 학생 관련 및 시급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교직원들의 출입을 허용했고, 상당수의 교직원들이 각 부처에서 업무를 진행했지요. 학교 본부의 이런 공격을 예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6월 2일, 즉 이 이메일이 돌고부터 재무과 직원들이 출입요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재무과 직원들 들어오셔서 급한 업무 처리하셔도 된다고. 답변이 걸작이었다고 하네요. 학생들이 이렇게 문에 서 있고, 왔다 갔다 하는 거 감시하는 데 기분 나빠서 못 들어간다고. 그럼 찬 바닥에서 밤까지 새면서 점거 농성하는데, 기분까지 좋게 만들어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결국 핑계지요.

총장이 총장실에 없으니 직원들이 "이 때다" 하고 휴가를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친애하는 가족들에게 사과메일까지 돌릴 정도면 어떻게 해서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생들 장학금, 시간강사, 청소노동자 분들의 임금을 빌미로 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꼼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오히려 총학생회가, 언제든지 본관으로 찾아와 해당 업무들을 처리하길 바란다고, 직원들에게 열려 있다고 다독이는 형편입니다. "신입생 맞춤형 장학금, 근로 장학금, 시간 강사료 등 학내 구성원들에게 그/녀들이 받아야 하는 임금 및 장학금에 대한 지급을 당장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라고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눈물겨운 목소리 "굶기면 점거 반대 시위라도 할 줄 알았냐?"

아, 그런데 말입니다. 이 이메일을 보고, '피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 내부 커뮤니티 중 하나인 '스누라이프(www.snulife.com)'에 아래와 같은 글들이 올라와 반응이 뜨겁습니다. 너무 절절한 글인데, 그 절절함에 어떻게 자르고 편집할 길이 없어서 아주 조금만 생략하고 본문을 그래도 인용합니다.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 등록하고 방금 오는 길이다. 반장 형이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하더라. 과외는 왠지 사기 치는 기분이라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어차피 군대 가기 전에 등록금, 방값 번다고 공장 다니고 노가다 하고 안 해 본 일 없다. 니들이 돈 안 줘도, 안 굶어 죽으니 걱정해주실 필요가 없다.

(줄임) 너희는 진짜 1100여 명의 근로장학금 받는 학생들이랑 그 외 월정 생활안정 장학금 받는 학생들이 니들이 밥값 딱 끊고 굶어 죽으라 하면 곱게 굶어 죽을 거라고 생각했냐? 아니면 점거 반대 시위라도 해서 애들 사이에 분란이라도 일어날 거로 생각한 거냐?

(줄임)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사람 목구멍에 들어가는 밥 갖고 목줄 쥐고 흔드는 게 할 짓이냐? 이게 선생이라는 작자들이 제자 상대로 하는 행사냐? 난 그렇다 치고, 어렵게 공부해서 이제 대학 들어온 갓 스무 살 먹은 11학번 근로 장학생 애들한테 꼭 이런 식으로 사회는 더러운 거야, 밥숟가락 입에 넣기가 이렇게 고되고 비굴한 거야. 이렇게 뼈저리게, 차갑게, 더럽게, 유치하고 치졸하게 비겁하게 가르쳐 줘야 했냐?

뿐만일까요? 점거 때문에 자기 월급 못 받는다는 메일을 받은 또 다른 근로장학생도 글을 올렸습니다.

재무 관련 업무가 정상 가동되는 현 시점에서 내 월급가지고 장난치는 학교 높으신 분들,  내가 그런 걸로 협박하면 아이구 님 죄성 ㅠㅠ 곱게 쳐박혀서 공부나 할게여, 이럴 줄 알았습니까?

비록 가진 거 쥐뿔도 없고 그깟 돈 30만 원 없으면 방세 좀 밀리겠지만 좀 굶겠지만 좀 힘들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거 확실히 뇌에 각인시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저처럼 가난한 근로장학생도 여러분의 용기와 행동에 지지를 보냅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꼭 승리하십시오.

"총장님, 당신은 교육자가 아닙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말씀처럼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법인화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날치기 법안이지만 그래도 법이 만들어졌는데, 따라야 하는 거 아니냐. 동의하진 않지만, 그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라면,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자라면, 그리고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당당하려면, 이렇게 뻔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궁지에 몰어넣으려고 해선 안 됩니다.

경제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장학금을, 새벽 5시부터 학교에 나와 청소를 해주시는 나이든 분들의 월급을 학생들이 점거한다고 못 준다고 하셨습니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그 얇은 월급봉투를 흔들면서 여론몰이 수단으로 사용하시다니요. 그렇게 재무처리가 전면 중단이라면, 교수님들 월급도, 어마어마한 서울대학교 총장님 판공비도 모두 중단입니까?

학생들은 점거농성을 하고 나서야 지금의 대학이 어떤 곳인지, 이런 인식을 가진 분들이 추진하는 법인화가 어떤 것일지를 피부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2011년, 대한민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이렇게 세상을 배웁니다. 아래 글을 쓴 이는, 올바른 교육자라면 어때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이 상황속에서 뼈저리게 배웠을 것입니다.

"오연천 총장님 이하 이 치졸한 방법을 고안하신 분들에게 고합니다. 당신들은 이메일 통보를 통해 학생들을 매우 걱정하는 척하고 있지만, 가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밥줄부터 쥐고 흔들면서 협박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저희 학생들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총장님 당신은 교육자가 아닙니다."
#오연천 #서울대 #법인화 #본부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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