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과 이승만 이승만 시절 승승장구한 백선엽 대장이 경무대 행사에 참석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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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과 박정희. 평소 알고 지냈을 법도 한 이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박정희의 좌익활동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군부내 숙군(肅軍) 바람이 휘몰아쳤는데, 여기에 박정희가 걸려든 것입니다. 여러 증언과 자료들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부내 조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군사재판에 회부돼 처형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명해준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었습니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대령)으로 있으면서 숙군 총책임자였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 소령으로 다시 군에 복귀하였고, 백선엽은 1사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한 백선엽은 미군과 함께 칠곡에서 '다부동전투'를 치렀으며, 다시 반격에 나서서는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입성으로 그는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전쟁 중인 1952년 7월 그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32세였습니다. 6·25 발발 직후 전사한 채병덕 후임으로 정일권이 졸지에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三軍總司令官)에 취임한 때가 33세 때였으니 백선엽도 이에 못지않게 승승장구한 셈입니다.
한편 현역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1953년 11월 준장으로 승진, 장군이 되었으며 2년 뒤 55년 7월 5사단장으로 나가면서 '은인' 백선엽을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 백선엽은 육참총장을 마치고 1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5사단이 1군 예하에 있었습니다. 그 해 '탄신 80회'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시찰을 하면서 5사단에도 들러 박정희 사단장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날 박정희는 이승만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박정희는 평소 그가 따르던 이용문 장군과 함께 이승만 축출을 도모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용문이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백선엽과 박정희(1)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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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백선엽-박정희로 이어진 라인업은 1960년 4·19혁명을 기화로 졸지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최고권력자 이승만은 4·19 일주일 뒤인 4월 26일 대통령에서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군사령관을 마치고 두 번째로 육참총장에 취임한 백선엽은 59년 연합참모회의 의장(현 합참의장) 재임 중 4·19를 맞았는데,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의 군부 쇄신운동에 떠밀려 급기야 그 해 5월 말 군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백선엽은 주중대사를 시작으로 근 10년간 해외에 대사로 나가 있었습니다. 결국 최후의 생존자는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한편 4·19혁명 이듬해인 1960년 5월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마침내 최고의 권좌에 올랐습니다. 박정희는 해외를 떠돌던 백선엽을 불러들여 교통부장관(1969~1971)을 시킨 다음 이어 국영기업체 여러 곳의 사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은인'에 대한 그 나름의 '보은'이었을 것입니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망명지 하와이에서 별세한 후 시신이 국내로 운구되자 박정희는 3부 요인을 대동하고 김포공항으로 나가 영접하였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하였습니다. 이 역시 한때 그가 모셨던 지도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였을 것입니다.
이승만·백선엽, 역사의 법정에 두 번 세우려는 KBS

▲백선엽과 박정희(2) 백선엽(왼쪽)을 교통부장관에 임명하는 박정희(19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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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승만과 박정희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제 남은 한 사람 백선엽은 1920년생으로 올해 91세입니다. 백선엽을 뺀 두 사람은 모두 대통령을 지냈으며, 백선엽은 이들 두 사람 밑에서 장군과 장관을 지냈습니다.
권력 창출자가 아니었기에 백선엽은 최고 권좌에 오르진 못했지만 한 개인으로 보면 부귀영화를 두루 누린 셈입니다. 특히 박정희와는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낸 사이라고 하겠습니다. 4·19와 5·16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이들이 새삼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풍미했던 이들 3인은 이제 '역사의 법정'에 섰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공(功)과 과(過)를 빠짐없이 저울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나서 평가할 것은 평가하고 또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KBS의 이승만·백선엽 찬양 프로 제작이나 보수 일각에서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은 모두 '페어플레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들에 대한 역사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거든요. 사적 인연을 앞세운 일방적인 찬양은 되레 그들을 두 번 법정에 세우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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