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11일 HID 북파공작원 동지회 및 유가족들이 정부사령부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권우성
심문규의 죽음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졌다. 아들 심한운은 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무려 45년간 외삼촌댁에서 자신을 만나고 간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그러던 중 2006년 4월 25일 국방부로부터 아버지의 사형 집행 사실을 통보받게 된다.
이에 심한운은 아버지 심문규가 간첩으로 남파되기는 했지만 자수를 했는데도 사형시킨 것은 너무나 억울하며, 더욱이 그 사실을 45년간 숨긴 것은 가족에 대한 인권침해라며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진실위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자수한 심문규는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민간수사기관에 이첩해 수사 받아야 했다(군속으로 보았다면 육군특무부대). 하지만 HID는 수사권이 없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563일 동안이나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심문과 북한에 대한 정보 파악, 그리고 남파간첩 등과 접선하게 하여 간첩을 검거하는 데 활용한 후 1959년 4월 25일 육군특무부대에 송치했다.
육군특무부대는 심문규를 수사한 후
① 북한군에 체포되어 아방군사기밀을 제공하고 ② 1953년경 미착크부대에서 공작원으로 투입한 공작원 최O수를 적발했으며 ③ 간첩으로 피선되어 교육을 받고 남파되어 임무수행을 포기하고 10. 8. 자수한 자로"본건 피해자 소위는 국방경비법 제33조에 해당하나 공훈이 유함으로 정상을 참작하야 의법 처단함이 가하다고 사료함"이라고 기재한 송치 의견서를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제출하였다.
송치 의견서만 놓고 보면 ①과 ②의 범죄 혐의는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심문규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한 것으로 유죄로 하기 어려우며 ③의 범죄혐의는 남파되어 자수했으므로 군법회의 회부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감경 사유에 해당된다.
특무부대가 이같은 의견서를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제출하자 육군첩보부대는 심문규가 위장자수해 HID에 침투한 것처럼 '심문규 심문경위서'를 허위로 작성해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추송한다. 결국 중앙고등군법회의는 그를 근거로 심문규에게 사형을 판결했으며 대구교도소는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지 10일 후인 1961년 5월 25일 사형을 집행했다.
45년간 심지어 가족들에게조차 심문규의 죽음이 은폐됐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대한민국은 왜 심문규를 사형시켰나이 사건은 진실위 조사 개시 단계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우선은 북파공작원의 신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북파공작원 심문규는 군인(또는 군속)인가 아닌가. 군인 또는 군속이라면 육군특무부대에 수사권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는 북파공작원은 민간인이라는 입장이었고 심문규의 판결문이나 수사기록 등에도 민간인으로 기재돼 있었다. 이에 진실위도 심문규를 민간인 신분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육군첩보부대와 육군특무부대가 자수한 심문규를 민간수사기관인 경찰이나 검찰에 이첩하지 않고 수사한 것은 불법이다.
두 번째 논란은 어찌됐든 심문규는 북한에서 간첩 교육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었다는 점이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심문규는 아들 심한운을 북파시킨다는 말을 듣고 자진해 간첩이 됐다. 비록 자수하긴 했지만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까지는 심문규가 간첩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는 의견과 곧바로 자수한 점을 보면 간첩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이 점은 최종수사를 담당한 특무부대의 송치의견서가 입수되면서 정리됐다. 특무부대의 송치의견서에는 심문규가 "임무수행을 포기하고 자수하였다"라고 기재돼 있었다.
조사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심문규에 대한 기록은 현 정보사령부와 현 기무사령부에 나눠져 보존돼 있었다. 그런데 정보사령부는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진실위에 기록을 제출하지 않고 직접 가져와 열람만 시켜주겠다고 했다. 정보사령부가 열람시켜준 기록을 메모해 조사 근거로 위원회에 제출할 경우 그 내용을 위원회가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결국 진실위 조사관이 정보사령부가 열람 허용한 기록을 모두 수기로 옮겨 적어야 했다.
논란은 최종 결정과정에서도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조사가 완료돼 위원회에 '진실규명'으로 보고서가 제출됐다. 하지만 위원회는 '진실규명불능'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왔다. 지금까지 심문규 사건과 동일한 사례가 없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함께. 한 술 더 떠 지금까지 진실위 인권침해조사국 사건 중 '진실규명불능'사건은 1건도 없었으므로 이번 1건 정도는 불능으로 남겨도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장시간 논의를 거쳐 표결에 들어갔지만 결국 과반수인 8명의 찬성을 얻지 못해 '진실규명불능'으로 결정됐다.
이에 아들 심한운은 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의제기했고,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재조사에 들어갔다. 진실위 조사관들은 약 2만여 쪽이 넘는 국방경비법 위반자 판결문을 검토해 심문규와 유사하게 처벌받은 사람을 10명을 찾아내 유사사례가 있었음을 증명했다. 또 심문규를 북파시킨 부대의 북한공작장교 신OO로부터 "당시 HID 소속 북파공작원들 중 북파됐다가 검거돼 이중간첩으로 내려와 자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기간인 2년 동안 고정간첩 검거나 북한에 대한 정보파악 등에 활용한 후 다시 북파 시키거나 이를 거절하면 간첩으로 기소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진술 등을 추가 확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