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결론'기념일 축하해요, 잘 사세요"

아이들이 준 결혼기념일 선물은 나침반과 '향기나'

등록 2011.08.27 15:44수정 2011.08.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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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씨와 김희애씨가 주연한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를 아시나요. 1993년에 나온 영화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년 계장 구영섭(문성근 분)은 소심 그 자체로 맞선을 99번이나 봤지만 번번이 차이는 노총각이었지요. 그런데 100번째 만난 사람이 첼리리스트 정원(김희애 분)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조건'으로는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결과는 101번째 프로포즈로 막을 내렸습니다. 문성근씨가 트럭 앞으로 뛰어들어가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31번째 만난 여성, 내 시곗줄에 반해 

 

저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영섭보다는 못하지만 31번째 만난 여성-바람둥이가 아님-을 1997년 6월 11일 만났습니다. 한눈에 반했습니다. 아내도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차고 있던 시계줄(가죽)과 손목 사이에 작은 공간에 반했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되려면 눈이 뒤집어져야 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시계줄과 손목 사이 작은 공간에 반하는 아내를 보고 알았습니다.

 

솔직히 외모를 비교하면 아내가 1등이라면 제 외모는 뒤에서 1등이지요. 아내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인데 여름이라 저는 어머니께서 삼베 저고리를 해준 것을 입고 시장에 갔습니다. 뒤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어르신 먼저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인데 아내가 시계줄에 반했습니다.

 

벌써 14년이 지났습니다. 오늘(26일)이 결혼기념일입니다. 원래 이런 날은 남편이 아내를 위해 준비한다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아이들이 며칠 전부터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을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큰 아이는 벌써 선물을 샀습니다. 막둥이가 내민 결혼 선물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나침반이었습니다. 아내가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했습니다.

 

결혼기념일 선물이 '나침반'!

 

"이게 결혼 선물이야? 아니지 이것은 네 학용품이야."

"아니예요. 제가 선물이라고 하면 선물이예요."

"억지도 부릴 것을 부려야지. 이것은 선물이 아니야."

"아빠, 편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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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철자가 틀린 막둥이. 마음이 아립니다. 4살때 전신마취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혹시 그 영향일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합니다. ⓒ 김동수

아직도 철자가 틀린 막둥이. 마음이 아립니다. 4살때 전신마취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혹시 그 영향일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합니다. ⓒ 김동수

부모님께

저 체헌이예요

잘 계시죠. 결론(결혼)기념일 축하해요

행복하게 잘 사세요

몸도 건강하세요.

 

"결혼을 '결론'이라고 쓰면 어떻게 하니."

"내가 그래도 아빠 엄마 결혼기념일에 편지 썼잖아요."

"1학년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면 어떻게 하니."

"그래도 내가 썼단 말이예요."

 

막둥이는 그만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생각해서 썼다'는 막둥이 말에 가슴 한켠이 아려왔습니다.

 

"그래 막둥이 고마워. 엄마도 고마워서 그런거다."

"내가 썼단 말이예요."

"그래 알았어. 막둥이 고마워."

 

겨우 진정을 시켰습니다. 우리 막둥이가 조금 늦은 이유가 있습니다. 4살 때 수술을 받았습니다. 전신마취를 했습니다. 어른들도 기력이 떨어지면 전신마취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막둥이도 어린 나이가 큰 수술을 받아 지능이 조금 떨어질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든 집에서 막둥이는 그 자체만으로 아린 것인데 수술 생각만 하면 더 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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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딸과 막둥이 결혼 14주년 선물이라 무릎꿇고 줍니다. 선물은 2000원짜리 향기나였습니다 ⓒ 김동수

예쁜딸과 막둥이 결혼 14주년 선물이라 무릎꿇고 줍니다. 선물은 2000원짜리 향기나였습니다 ⓒ 김동수

 

14주년 결혼기념일 선물은 '향기나'

 

큰아이와 둘째 딸아이는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습니다. 받은 용돈을 조금씩 모아 산 것 같은데 집과 차 안에서 둘 수 있는 '향기나'였습니다. 아주 짧은 편지를 썼습니다. 14주년 결혼기념일 그림까지 그렸는데, 아무리 제 딸아이지만 그리기 실력은 영 아닙니다. 그런데 저 실력으로 4학년 때 학교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14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려요

저희가 열심히 준비하였지만 많이 부족해요.

그래도 저희 마음이니 받아 주세요.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가요

예쁜 딸 서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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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가 그린 축하 그림입니다. 아무리 딸 아이지만 그림 실력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런 실력으로 4학년 때 학교에서 그리기 대회 대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 김동수

딸 아이가 그린 축하 그림입니다. 아무리 딸 아이지만 그림 실력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런 실력으로 4학년 때 학교에서 그리기 대회 대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 김동수

큰아이도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녀석 정말 말이 없습니다. 요즘 엄마와 한번씩 다투는 모습을 보면 사춘기가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내는 첫 아이라 그런지 자기 모든 것을 다 드렸지요. 어떤 때는 젖꼭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젖을 먹였습니다. 둘째와 막둥이는 그냥 컸는데 큰아이는 많이 울고, 아프고, 잠도 잘 자지 않았습니다.

 

아빠 엄마

결혼하신지 14년만에 처음으로

결혼기념 선물을 처음 사드렸습니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동생과 용돈을 모아 

1000원, 2000원 짜리 선물을 사드렸어요.

아주 작은 선물임에도 기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아들 인헌 올림

 

1000원, 2000원짜리 작은 선물이지만 아내와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를 닮아 문장도 짧고, 글재주도 부족하지만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을 담은 글은 어느 위대한 문장가가 쓴 글보다 가슴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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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원짜리 향기나 선물을 받은 아내 어이가 없고,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아이들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 김동수

2000원짜리 향기나 선물을 받은 아내 어이가 없고,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아이들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 김동수

"오늘 정말 기분 좋다. 14년 만에 너희들에게 선물을 다 받았네."

"아빠 이번에는 나침반 선물했지만 다음에는 더 좋은 선물 사드릴게요."

"우리 막둥이는 그럴 거다."

"아빠 엄마 2000원짜리 선물도 고마워요."
"고맙지. 몇 만원짜리 선물보다 더 고맙다. 아빠 차가 오래되어 냄새가 나는데 향기나가 있으면 괜찮을 거다."

 

한편으로 참 어이가 없었지만,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 준 아주 작은 14주년 결혼기념일 선물은 값비싼 선물보다 더 귀한 보배로운 선물이었습니다. 참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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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년결혼기념일 가족사진 ⓒ 김동수

14주년결혼기념일 가족사진 ⓒ 김동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결혼기념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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