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 북한 없고, 인권위에 인권 없다

[인권위 공무원의 '정직한' 일기 ①] 남편 직장 앞에서 1인 시위한 아내

등록 2011.09.07 20:16수정 2011.09.0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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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최고 조사관으로 손꼽히던 강모 직원의 '계약해지'에 항의해, 인권위 직원 80여 명이 1인 시위, 언론 기고, 자유게시판 게시, 탄원서 제출 등을 진행했다. 인권위는 이 중 11명에 대해 9월 2일 자로 정직 및 감봉 1~3개월 등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앞장서 보호해야 할 인권위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징계자들은 공무원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정직' 처분을 받은 직원의 '정직한 일기'를 싣는다. <편집자말>

[정직일기 1회]

 

9월 2일 오전 6시.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려다 멈칫거린다. 오늘부터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다. 눈을 비비고 컴퓨터를 켜니 제주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 소식이 눈에 들어온다. 강정마을에 내려가 있는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주민의 반대에도 공사를 밀어붙였던 평택 대추리의 복사판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정직기간 중 들러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생겼다.

 

아내는 아침부터 바쁘다. 남편의 근황에 무덤덤하던 그가 MBC <PD수첩> '인권위 징계사태'를 본 뒤 조금씩 달라졌다. 부부의 대화 내용에 한국의 인권상황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아내는 "말도 안 되는 징계"라며 "이런 인권위가 앞으로 어떻게 국민의 인권을 챙길 수 있겠느냐?"고 항변했다. 아내는 오늘 남편의 회사로 찾아가 피켓을 들겠다고 했다. 남편은 아내의 뜻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이 지난겨울 나섰던 그 자리에서 똑같은 피켓을 들었다.

 

a  9월 2일 아내의 인권위 앞 1인 시위.

9월 2일 아내의 인권위 앞 1인 시위. ⓒ 박상규

9월 2일 아내의 인권위 앞 1인 시위. ⓒ 박상규

'붕어빵에 붕어 없고 북한산에 북한 없고 인권위에 인권 없다.'

 

이 문구는 국가인권위원회 고등징계위원회가 "위원회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나는 아직도 왜 그것이 '모욕'인지를 알지 못한다. 인권위도 그 이유를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당연히 아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혹시 우리가 불가의 선문답을 나누는 건 아닐까?

 

나는 아내의 1인 시위 소식을 직장 동료들의 문자 메시지로 들었다. 그들은 시시각각 인권위 앞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생생히 전해주었다. 배려와 애정이 듬뿍 묻어 있었기에 바로 옆에서 아내를 지켜보는 듯했다. 좋은 분들과 함께 일한다는 건 행복이다. 좋은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축복이다. 인권위에서 보낸 9년 동안 상처도 적지 않았으나, 내가 누린 행복과 축복은 분명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1인 시위를 끝낸 아내와 종로를 걸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 이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열사들의 죽음, 월드컵의 환희, 신혼살림의 추억이 모두 이 거리에 묻혀 있다. 모처럼 오후연가를 내고 도심으로 나온 아내는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평일 오후의 부부데이트가 몇 년 만이던가? 그 단순한 일상의 여유로움을 징계 처분을 받고 나서야 알았다. 하여 나는 정직이라는 중징계가 조금은 고맙기도 하다.

 

보신각 앞에서 장애인들의 시위를 지켜보았다. 장애계의 이슈인 장애인활동지원제도 고시안에 반대하는 규탄대회였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아 일일이 인사를 드렸더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징계를 받았다고 하니 인권위에 대한 성토가 쏟아진다. 그분들의 말문을 막으며 도리어 죄송하다고 답했다. 인권위 공무원으로서 현장보다 서류에 더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비록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한다지만, 그저 현장을 비추는 좁은 프리즘일 뿐이다.

 

종로3가에서 영화를 보고 차를 마셨다. 아내는 정직기간 중 두 아들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힘써달라고 주문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간단치 않은 일이라 여겨진다. 공동육아에 7년째 참여하고 있지만 아이들과의 소통은 여전히 쉽지 않다. 아빠가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내주지 못한 게 가장 큰 짐이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이제야 '가끔씩 거실에서 만나는' 가족이란 오명을 벗을 기회를 맞았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동네 농구장으로 갔다. 아빠와 두 아들은 50점 먼저내기 진검승부를 펼쳤다. 리틀야구 선수인 큰 아들은 날랜 몸놀림으로 아빠를 몰아붙였다. 50대48 아들은 승리했고 아내는 음료를 사주었다. 둘째를 목마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법원이 <PD수첩> 광우병 보도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를 들었다. 인권위가 기각한 그 사건이다.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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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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