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없는 자 유죄?...입술이 부르텄습니다

[댁의 추석은 편안하셨습니까 ③] 노처녀 가슴에 상처 입히는 명절 인사

등록 2011.09.19 11:26수정 2011.09.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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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앞두고 기차표 예매 대란이 일어났다. 나 역시 열차 승객이 가장 많은 경부선을 타야 하는 터라,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선 그 대란에 끼어들어 기차표를 쟁취해야 했다. 그러나 좋게 말하면 '무의미하게 경쟁하여 쟁취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 탓,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성격 탓에 기차표 예매를 위한 백만 번 클릭은 물 건너가버렸다. 그리고 사실, 서른 살을 넘기고부터는 '의도적으로' 그 대란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명절은 '지금 신랑 없는 자, 유죄' 임을 확증시켜주는 날이기도 하다. 노처녀에겐 그렇게 "표가 없어서 이번에 못 내려가겠어요"라는 구차한 핑계를 대서라도 피하고 싶은 날이다. 이번에도 사실 기차표 예매를 미루고 미루었는데, 알뜰살뜰하게 내 표까지 예매해놓은 지인 덕에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됐다.

'얄미운 사람' 때문에 입병나다

그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시집가라'는 말 3년 들으면 잘 받아칠 줄도 알고, 귓등으로 들을 줄도 알고, 흘려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잘 새기고 이겨냈다고 생각했건만, 몸이 그만 축나고 말았다. 추석 3일 연휴 동안 그렇게 잘 먹고, 잘 쉬고, 잘 잤음에도 불구하고 입병이 나고 말았다.

a 입병 났어 명절스트레스로 인한 구순구각염

입병 났어 명절스트레스로 인한 구순구각염 ⓒ 박진희

명절에 노처녀들의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얄미운 악당'이 되고 만다. 악당 1호는 단연 부모님이다.

"나이 서른둘에 뭘 그렇게 가리는 게 많냐"며 '눈코입'만 달렸으면 데리고 오라는 협박부터 시작해, "그때 그 사람은 명절 때 집까지 태워주고, 얼마나 편했냐"는 이미 자식 둘은 뒀을 옛남자 이야기 꺼내기, "작년에 큰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사람 한 번 더 만나보라"는 어처구니없는 떼쓰기 등 각종 필살기를 꺼내는 부모님만 악당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동생은 결혼해 애까지 낳았는데, 니는 아직 머하고 있노"를 "오랜만이구나"쯤의 의미로 착각하고 명절 인사로 건네는, 수백 명에 달하는 교회 집사님들도 내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래도 가장 배신감을 주는 악당은 부모님도 제부도, 집사님도 아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 배를 탔던' 한때는 노처녀였고, 지금은 신혼 단꿈에 젖은 언니들이었다.

"한시라도 젊을 때 애 낳아야 해. 젊어야 입양이라도 할 수 있어"를 명절 인사로 건네는 얄미운 악당은 불과 몇 달 전, 내 앞에서 결혼의 꿈을 이루기가 이리도 힘드냐며 고통을 토로하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물론 나를 생각해주어 하는 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 들었을 잔소리를 보태는 사람치고는 너무 빨리 '올챙이적'을 잊은 건 아닌가 싶다. 

누군들 결혼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도 내겐 좋은 소식이 많다
연락 끊긴 친구들도 명절에는 인사 문자가 온다. "좋은 소식 없니?" 그러면 나는 언제나 "좋은 소식 많은데, 네가 원하는 좋은 소식은 없어"라고 답한다.

정말로 내게는 좋은 소식이 많다. 연초엔 연봉이 동결되지 않고 올랐고, 일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출근하기 전 꾸준히 배우고 있는 새벽 수영은 벌써 접영 단계에 들어갔고, 얼마 전 MBC 특별기획 <코이카의 꿈>에 지원해 아쉽게 탈락했지만 최종면접까지 올라 박상원 아저씨와 김영희 피디를 보는 감격을 맛보았다. 기획한 책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외딴 섬 봉사활동을 가 영정사진을 찍어드려 할머니들을 기쁘게 해 드린 것 등 나의 좋은 소식엔 모두들 무관심이다.

a 도전하는 노처녀 정말 즐거웠던 면접 시간

도전하는 노처녀 정말 즐거웠던 면접 시간 ⓒ 박진희

누군들 결혼하고 싶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들 낳고, 알콩달콩 사는 꿈을 노처녀들은 싫어하는 게 아니다. 추석이 되면 나는 마치 수험생이 된 기분이다.

'그래 이제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마음먹고,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공부 좀 해! 공부 좀 하라고!"라고 소리치는 통에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진 수험생 말이다.

우리는 명절에 단계별 의식을 치른다. "공부 잘하니?" 다음엔 "대학 붙었니?" 그 관문을 넘으면 "취직해야지?" "시집가야지?"의 산을 넘어야 하고, "아이 낳아야지?"의 문턱을 통과하면 "애 공부는 잘하니?" "둘째 낳아야지?" "애 대학 붙었니" "애 시집은 갔니" 등의 끝도 없는 관문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한번쯤, 열심히 '공부'만 생각하는 수험생에게 "야, 개콘에 '서울메이트' 정말 재밌지 않냐?"라고 물어봐주는 큰아빠를, 열심히 '결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노처녀에게 "수영할 때 평영 발차기 진도 어떻게 뺐니?"라고 물어봐주는 집사님을 기대해보는 건 너무 가망 없는 일일까?
#노처녀 #명절 #결혼 #내생애가장소중한사람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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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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