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결혼식, 다음 중 '신랑'을 찾아보시오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⑦] 똑같은 옷 입어 누가 신랑인지...

등록 2011.09.22 09:42수정 2011.09.2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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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옆집에는 전기회사 사장이 살고 있습니다. 보통 크기의 집을 세 채나 지을 수 있는 부지에 사장님 집 한 채를 지었습니다. 전기회사 사장 옆집이라 그런지 하루에 두세 번 정전이 기본인 필리핀에서 딱 한 번만 정전이 되는 특혜(?)를 받고 삽니다. 김치를 좋아하는 사장님이 토요일에 시내 성당에서 있을 아들 결혼식에 초대한다는 청첩장을 주러 직접 오셨습니다.

보통 신부가 사는 도시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신부도 일로일로 사람이라서 시내에 있는 성당에서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평소 제니퍼(우리 회사 비서, 남자친구가 있는 23세 아가씨)가 기부금 20만 페소는 내야 결혼할 수 있다고 노래를 부르던 '비싼' 성당입니다. 한창 결혼식에 관심이 많은 제니퍼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예식시간이 오후 2시라고 되어 있지만 평범한 필리핀 신부에겐 꿈일 뿐이라는 화려한 가톨릭 결혼식을 심층 해부하기 위해 30분 일찍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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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신랑인지 맞춰보세요. 맞추신 분께 발롯 10개 드립니다. ⓒ 조수영


결혼식에서 가장 어려운 건 신랑찾기

신랑과 신랑 측 하객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신랑 아버지를 비롯하여 신랑의 들러리들은 필리핀 예복인 '바롱(남자는 바롱 따갈로그, 여자는 바롯사야라고 부릅니다)'을 입고 있는데, 색깔과 무늬가 비슷비슷해서 수작업으로 제작한 8만 페소짜리 바롱을 입었다는 신랑을 구별해낼 수 없습니다.

바롱은 우리의 한복 같은 개념이긴 하지만 한복보다 폭넓게 입습니다. 정장을 대신한 자리, 결혼식은 물론 기념일, 축제, 졸업식 앨범 촬영 등 중요한 경우에는 바롱을 입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에 누울 때에도 바롱을 입고 하늘나라로 갑니다.

바롱의 원단은 마나 바나나 섬유 등으로 얇고 투명한 천을 엮는데 파인애플 섬유로 만든 것을 최고로 칩니다. 보통 몇 천 페소, 우리 돈으로 오륙 만 원 정도인데 천에 놓은 수가 수작업으로 많이 들어갈수록 비싸져 몇백 만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필리핀에서 선물한 바롱은 1000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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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롱은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섬유로 만든 얇은 천에 섬세하게 수를 놓아 만듭니다. ⓒ 조수영


알고 보면 바롱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식민 시절, 통치자들은 그들과 원주민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원주민에게 바롱을 입게 했다고 합니다. 투명한 천을 사용한 것은 옷 속에 무기를 감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고, 주머니를 못 만들게 한 것은 도둑질을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식민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화려한 문양을 수놓진 않았을 겁니다.


얼핏 보면 그저 뻣뻣한 흰색 망사 패션 같지만, 자세히 보면 부서질 듯 얇고 투명한 천에 일일이 섬세한 수를 놓아 문양을 만들어 예술품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구김은 쉽게 생기면서 다림질은 잘 되지 않고, 반드시 드라이크리닝이나 손세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실용적이진 않아 보입니다.

바롱을 입을 때는 반드시 안에 셔츠를 입어야 합니다. 이곳에 사는 한국인 남자들은 주로 흰색 '아저씨 난닝구'를 입습니다. 사실 흰 셔츠를 안 입으면 엄청 민망합니다. 웃기기도 하구요. 바롱입은 모습을 볼 때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나는 것은 저 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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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부모님은 물론 대부, 대모들도 바롱을 입고 오셨습니다. ⓒ 조수영


"결혼 취소된 거 아냐?"... 결혼식 20분 전까지 감감무소식인 신부

결혼식 20분 전, 바롱을 입은 신랑과 신랑 가족들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신부는 물론 신부 측 가족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합니다. 같이 간 제니퍼에게 물었습니다. 

"신부 측이 안 왔어. 결혼이 취소된 거 아냐?"
"깔깔. 아니에요. 식장에 먼저 도착하는 쪽이 집안에서 주도권을 잡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랑 측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거예요."
"(필리핀이 모계사회라던데 웬 남자 주도권?) 신부 대기실도 없어."
"신부는 성당 밖에 주차된 차 안에 있을걸요."

청첩장에 쓰인 시간은 예식 시작시간이 아닌 신부 측이 도착하는 시간인 듯 합니다. 결혼식 시간을 10분 앞두고 신부 부모님과 신부 측 들러리들이 도착했습니다. 마치 밖에서 모였다가 함께 들어오는 것처럼 우루루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습니다.

영화제에 레드카펫을 밟는 여배우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신부 들러리들은 늦게 왔으면서 미안한 기색도 없이 수다 떨고, 사진 찍고, 난리법석입니다. 하여튼 큰 카메라, 작은 카메라, 핸드폰 셀카까지 엄청 찍어 대면서도, 자리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집안 어른들이 오시는 대로 점잖게 앞쪽자리에 앉아주시는데 필리핀 어르신들은 여전히 입구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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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 참석한 가족과 들러리들은 자리에 앉지 않고 입구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화려한 황금색 드레스를 입으신 분이 신부의 어머님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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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들러리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 조수영


신부보다 들러리가 먼저 입장하는 '필리핀 결혼식'

이쯤 되면 30분에 한 팀씩 내보내는 한국식 결혼식에 익숙한 나는 지겨워집니다. 빨리 축의금을 처리하고 꽁무니를 뺄 시기를 보고 있었지만 한국에선 '입장권' 파는 것처럼 입구를 막고 서있는 축의금 창구가 필리핀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도 없고, 분위기 파악이 안 되어 낼 타이밍도 모르겠습니다.

시작한다는 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나서야('필리핀 타임'은 결혼식에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주례 신부님이 입장하고, 사회자가 결혼식 시작을 알리자 서른 명은 족히 넘을 신랑 신부의 일가친척과 들러리들이 마지막 몸단장을 하고 행렬을 정리합니다.

이제야 왜 그들이 자리에 앉지 않고 입구에 서있었는지 알겠습니다. 행렬의 맨 앞에는 신랑의 증인이 서고, 그 다음 신랑이 부모님과 함께 입장을 합니다. 신랑신부의 대부와 대모가 뒤를 이어 들어오고. 성경, 반지, 부케를 든 어린이 들러리들이 입장을 합니다. 그 다음은 30명 남짓한 신랑신부의 어른 들러리들이 쌍을 지어 입장하는데 들어와서는 신랑 측, 신부 측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져 자리에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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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신부의 대부와 대모가 입장을 합니다. 그들은 부부를 물질적, 정신적으로 이끌어 줄 사람들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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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 신부는 혼자 당당하게 입장하여 부모님을 만납니다. 그 뒤로 기다리고 있는 신랑의 모습이 보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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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객들은 신랑측, 신부측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져 자리에 앉습니다. ⓒ 조수영


신부 부모의 입장이 끝나면 모두들 오늘의 주인공 신부를 기다립니다. 음악이 멈추고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성당 정문이 서서히 열리면 신부가 짠~ 하고 나타납니다. 우와~ 멋있습니다. 역광 실루엣 덕분에 그 누구라도 여신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왜 성당에서 오후 두세시에 결혼식을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과 비슷합니다. 가톨릭식이라 몇 번 앉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주례를 맡은 신부님은 설교를 합니다. 뭐 결혼의 중요성,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런 내용입니다. 설교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반지를 교환합니다.

이쯤에서 끝날 것도 같은데 제일 중요한 것이 남았다고 합니다. 신랑, 신부는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들과 스폰서들이 모여들어 결혼증명서에 서명을 합니다. 서명을 하고 기념촬영까지 마치니 오후 6시, 이곳에서 4시간이나 있었지만 아직 피로연이 남았습니다. 필리핀 보통여자들의 꿈이라는 '가톨릭 결혼식'은 강인한 체력과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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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신랑, 신부는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들과 스폰서들이 모여들어 결혼증명서에 서명을 하는 것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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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증명서에는 신랑신부는 물론 부모님, 대부와 대모가 사인을 합니다. ⓒ 조수영


"제니퍼는 파자마 입고 결혼할지도 모른대요"

"근데 신랑 엄마가 성깔 있어 보이죠?"
"응, 이멜다 닮은 것 같아."
"그럼, 예쁘다는 말이잖아요?"
"그런가??"
"신랑도 못생기고 뚱뚱해요."
"훗!"
"신부도 안 예쁜데요."
"다 역광 덕분이지 뭐."
"이 사람들 정말 부자인가 봐요. 장식으로 쓰인 저 꽃이 한 송이에 20페소인데 100송이는 되어 보이고, 드레스도 예쁘고, 신부 들러리 드레스가 한 벌에 얼만데 스무 명이면…"

옆에 앉아 중얼거리며 결혼식 '견적'을 내고 있는 제니퍼를 보니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부러움과 질투', 여자들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많은 필리핀 여자들이 결혼식에 입을 옷을 직접 만들어요."
"너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지금은 파자마까지 만들 수 있어요."
"너 이제부터 남자친구랑 놀러 다니면 안 되겠다."
"왜요?"
"그렇게 놀고 다니면 파자마 입고 결혼해야 할지 모르잖아."
"호호. 그렇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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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후 가족이나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것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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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예쁜 신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30년을 함께한 이 부부는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립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 조수영


#필리핀 #결혼식 #바롱 #혼인서약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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