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그녀의 삶을 만났습니다

[서평]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읽고

등록 2011.10.11 16:47수정 2011.10.1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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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크레인 85호'에 올라간지 내일(12일)이면 280일째가 된다. 여름이 되면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살을 스치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다는, 겨울이 되면 추위가 속까지 파고들어 동상에 걸린다는 쇳덩어리 운전실에서 한 사람이 생존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그렇게 견뎌왔으니 고결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바른 목표를 향해 굴곡진 삶을 짊어진 그녀를 생각하며 책장에서 한 권의 책 <소금꽃나무>를 꺼내든다.

사회성이 강한 책을 만든다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펴낸 <소금꽃나무>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함이 가슴 아프기도 하거니와 내가 쓰는 서울 말씨와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말씨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힘들기 때문이다. 허나, 말씨가 아무리 다르다고 한 들 옳은 말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는 법.


노동자가 을매나 위대헌 사람이여? 근데 고걸 잘 몰릉께 나가 참 염병을 혀 볼제. 하루 열 시간 이상씩 일은 겁나게 혀 불고 대접은 뭣겉이 받으면서도 헐 말 한나도 읎게 되아 부렀응께 참말로 염병 되아 부렀소.(86p)

마음을 열고 읽으면,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노동자가 내 앞에서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건강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땀과 기름에 베인 작업복으로 한 그루의 소금꽃나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름밥을 삼켜야만 했는지, 또 너무 가까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듣다보면 이런 일이 아직도 일어나는 이 땅이 소름끼친다.

평화시장에서 분신하신 전태일 열사의 일은 역사책에만 기재될,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보조금 압류 현실 때문에 분개해 분신, 노조 활동 중단 각서를 회사에서 생계를 담보로 요구받아 분신, 그리고 현재 희망버스의 토대가 된 85호 크레인에서의 자살 등 <소금꽃나무>에 실린 열사들의 죽음만 해도 참으로 많고, 또 사연도 각자 다르다.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해, 죽음에서 삶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희망을 찾는 소금꽃나무들이 희망버스에 올라탔다. 추운 겨울 새벽에 글 한 장 남긴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가는 희망버스는 칠 백명 가량으로 시작되었지만, 며칠 전의 5차는 사천여 명이 참가했다.

희망버스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는 않다. 영도 주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소음에 괴로워한다, 부산국제영화제도 하는데 이게 무슨 국제적 망신이냐. 이유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몇몇 영도 주민들의 괴로움도 외국인들의 시각도 아닌 노동자들의 인권이다. 무능한 한진중공업 때문에 잘못도 없이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해야만 하는 현실을 뒤로하고는 주민들의 편안한 잠자리도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로 기억할 외국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나서 함께 가기 위해 김진숙 지도위원이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에 보낸 연대 메시지가 첫 번째 안건이 되었고, 시인 고은, 소설가 황석영을 비롯한 사회 원로들이 희망버스 지지 서명을 했다.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에 대해 한 마음으로 외치는 '희망버스'라는 이름의 축제는 모든 축제가 그러하듯 성대하면서도 아름답게 끝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스크린과 지면을 통해 오랜 축제로 때꼰해진 노동자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의 눈빛은 어두운 밤 밝히는 횃불처럼 뜨겁게 밝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기류도 분명 뜨거울 텐데 그 반대로 나는 아주 오래전 배웠던 차디찬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가 떠올랐다.


새벽 시내 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최두석 '성에꽃' 전문

벌써 날씨가 쌀쌀해 지고 있다. 추운 겨울이 되면, 김진숙 지도위원이 혼자서 크레인에 올랐던 때처럼 엄동 혹한이 되면 희망버스에도 다닥다닥 성에꽃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피어나겠지.

소금꽃 나무

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2007


#소금꽃나무 #희망버스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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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청년. 서울시립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했다. 감명 깊었던 현대문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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