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도둑맞으니까 마음이 급해졌어요"

심훈 셋째 아들, 심재호가 말하다③ - 심훈 첫 영인본 발행 과정

등록 2011.11.03 17:56수정 2011.11.0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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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 씨가 평생토록 모으고 간직한 심훈의 유품 4천5백여 점을 미국에서 당진으로 이전해 오기로 약속했다. 심훈의 육필원고에는 일본인들이 시뻘건 줄로 검열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토록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중요한 유적인가. 역사를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심재호 씨가 한 달여간 당진에 머물며 심훈 육필원고를 총정리한 뒤, 지난 15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평생토록 아버지 심훈의 발자취를 쫓았다. 심훈의 유품을 모으고 관리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그 자신도 아버지 심훈을 빼닮은 삶을 살아왔다. 군사정권시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산가족찾기운동으로 북한을 수시로 오갔다. 심재호 씨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가 기억하는 필경사와 공동경작회,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를 모으게 된 과정 등에 대해 듣고 기록한 것을 연재 보도한다.  -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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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선생의 삼남인 심재호씨가 부친인 심훈 선생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분향하고 있다. ⓒ 심규상


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 씨는 4천5백여 점의 심훈 육필원고 등을 평생토록 모으고 간직해 왔다. 심훈만큼이나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심재호 씨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미국으로 급히 건너가면서도 아버지 심훈의 유품은 등에 지고 다녔다.


처음 아버지의 유품을 송악 부곡리 큰집 다락방에서 발견했을 당시, 그는 아버지의 유품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다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유품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관하는 일은 자신의 몫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오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에 아버지의 유품을 맡겨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전국, 세계 어디에도 유일무이한 방대한 육필원고와 유품을 탐내는 이들은 각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수억 원을 줄테니 유품을 팔라는 대학부터 슬쩍 유품의 일부에 손을 대는 인사들까지. 심재호 씨는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유품이 꽤 된다고 털어놨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날이 오면>이라고 알려진 <심훈시가집 제1집>이다.

"'그날이 오면'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 본인이 <심훈시가집 제1집>으로 직접 이름을 지었어요. 그리고 1919년부터 1932년까지라고 적었지.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자신이 손수 책을 만들었어. 직접 원고를 쓰고 끈으로 묶어서 만든 거지. 책을 만들어서는 조선총독부에 출판허가를 냈다고. 그랬더니 그렇게 새빨갛게 그어서 돌려준 거예요."

심재호 씨는 "<심훈시가집 제1집>은 여러 번 도둑을 맞았다"며 "잃어버렸다 찾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고 말했다.


"세상에 <심훈시가집 제1집>은 하나뿐인데 그걸 자꾸 도둑맞으니까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래서 서울고등학교 후배 중에 출판사를 하는 녀석이 있어서 당장 영인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지. 내가 현찰 주고 원고를 넘겨 줄테니 영인본으로 만들어라, 이것 하나밖에 없는데 더 이상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이야."

그렇게 급히 만든 영인본이 바로 차림출판사에서 2000년 1월1일 펴낸 <심훈전집 제1권 그날이 오면(영인본)>이다.

한편 심재호 씨는 "아버지가 출판허가를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에 보낸 원고가 어떻게 다시 본인에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심훈시가집 제1집>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검열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있어요. 빨간 줄이 주욱 그어져 있는 게 그대로 나타나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검열을 하고 다시 본인에게 돌려보냈는지가 의문이에요."

하지만 심재호 씨는 첫 영인본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급히 만든 데다가 자신이 미국에 살았던 터라 직접 제작 과정을 보지 못해 결과물이 엉성하다는 것이다.

"만들긴 만들었는데 형편없어요. 내가 미국에 있었으니까. 체계와 순서가 엉망이라 조만간 다시 만들 계획이에요. 그래도 그게 살렸어요. 국가 보물이 살아난 것이죠."

<글 싣는 순서>
1. 심재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필경사- "필경사는 꽃동산이었죠"
2.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 모으게 된 과정- "중학교 때부터 70년을 이고 지고 다녔지요"
3. 심훈의 첫 영인본 발행 과정- "자꾸 도둑맞으니까 마음이 급해졌어요"
4. 심훈 선생의 주변인물과 <박군의 얼굴>에 얽힌 이야기
5. 아버지 심훈 빼닮은 심재호의 삶 1
6. 아버지 심훈 빼닮은 심재호의 삶 2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당진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당진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경사 #당진 #심훈 #심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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