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뼈에 타박상...그가 119 못 부른 까닭

1960년대 미국 흑인 가정부와 2011년 한국 대학 청소부... 그 닮은 꼴

등록 2011.11.14 14:35수정 2011.11.1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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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헬프> 포스터 ⓒ 드림웍스

'헬프(Help)'는 가정부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목은 '가정부'다.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 속에 나오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다른 뜻은 없다. 그냥 '가정부'다. 어떤 수식어도, 다른 숨겨진 뜻도 없는 '가정부',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 <헬프>(2011)는 1960년대 미국 남부에서 살아가는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이자 그들이 자신의 삶을 책으로 엮어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속 가정부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물론 그 책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2011년 대한민국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으니까.

<우리가 보이나요>. '홍익대 청소 경비 노동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도 '청소 경비 노동자'인 셈이다. '가정부'와 '청소 경비 노동자'를 다룬 두 이야기, 부끄럽게도 정말 닮았다.

196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가정부

1960년대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주(州) 잭슨. 한때 주 인구의 절반이 흑인일 정도로 많은 흑인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방인이자 하류 계층일 뿐이다. 건물에 들어설 때도 '유색인(colored)'이라고 쓰인 화살표를 따라 정해진 출입구로만 들어서야 하고, 대개는 다른 버스를 타야 하며, 다른 학교와 다른 교회를 다녀야 한다.

'분리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 낯선 풍경 속에 숨어 있던 낡은 철학이다. 분리가 그 자체로 엄청난 차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던 야만의 시대가 낳은 모순,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그들이 삶의 곳곳에서 부딪혀야 했던 차별과 폭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흑인 가정부들은 백인들을 대신해 온갖 집안일을 도맡는다. 백인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백인들과 같은 식기와 수저를 써서는 안 되며, 심지어 같은 화장실을 써서도 안 된다. 알 수 없는 병균을 옮길 수도 있는 더러운 인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항의는커녕 말대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나가라는 말 한마디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흑인 가정부들의 삶이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이는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바이올라 데이비스)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모두 17명의 백인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지켜주지 못했다. 십여 년 전 그녀의 아들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백인이 운전하던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폐가 으스러질 정도의 중상을 입었지만 백인들은 그를 흑인 병원 앞에 던져둔 채 사라진다. 떠나기 전 경적을 울려주는 것으로 백인으로서의 도리를 다 했다고 여긴 것이다.

결국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던 그녀의 아들은 집으로 옮겨진 뒤 에이블린 앞에서 숨을 거둔다. 하지만 백인의 잘못으로 죽은 흑인 아들을 위해 흑인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영화가 전하는 시대의 풍경은 이렇듯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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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헬프>의 한 장면 ⓒ 드림웍스


2011년 대한민국의 서울의 청소경비 노동자

2011년 대한민국 서울. 올해 1월 3일, 새해 첫 출근 날이었다. 홍익대 청소 노동자들은 여느 때처럼 일터를 찾았지만 있어야 할 출근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경비실에도 낯선 이들이 앉아 있었다.

"아저씨, 왜 출근 카드가 없어요? 찍고 가서 우리 일해야 되는데. 아니 아저씨, 우리 아저씨들 휴가 갔어요?"
"아줌마들 이제 끝났어요. 이제 여기 직원이 아니에요."
"왜요, 왜 직원이 아니에요?"
"용역회사가 12월 말에 끝나고 떠났잖아요."(<우리가 보이나요> 16쪽)

일터에서 쫓겨난 것이다. 왜 그만둬야 하는지, 아니 그만두라는 말 한마디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 '그래도 되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다.

"니네는 내 발밑에 때도 아니라고 판단을 했으니까 그렇게 내쫓은 거야."(<우리가 보이나요> 22쪽)

그렇다고 좋은 일터도 아니었다. 이미 여러 경로로 알려졌지만, 이들은 밥을 먹거나 쉴 곳도 마땅치 않아 계단 아래나 지하창고, 또는 배관실이나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밥값을 아끼려 도시락을 싸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학교 측에서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 겨울에도 찬밥을 먹어야 했다. 이들에게 대학 측이 제공하는 식대는 한 달에 9000원, 하루 300원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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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이나요> 표지 ⓒ 한내

그뿐이 아니다. 학교 측은 임금을 조금이라도 덜 주기 위해 오전 11시~2시, 오후 2시~3시를 휴게 시간으로 정했다. 수업이 끝나는 6시까지 이들을 붙잡아두면서도 추가 근무 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곳에 머물면서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 일을 해야만 했고, 잠깐 외출이라면 할라치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외출증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며 이들이 받는 평균임금은 여성이 74만3000원, 남성이 102만9000원이었다. 추가 근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커녕 여성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있던 것이다.

원청인 대학 측은 늘 용역업체 뒤에 숨어 이러한 책임에서 비켜서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과 책임은 대학 측에 있다. 최저낙찰제 방식으로 용역업체를 선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단가는 점점 낮아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가지고 갈비뼈랑 여기 타박상을 입어 가지고 숨도 잘 못 쉬겠고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직원들이 다 나와 가지고 그냥 119 부르라는데 안 갔어요. 왜냐면 직장 떨어질까봐. (줄임) 한참 있다 일어나 앉았다가 정말 여기 계단을 내려서 저기 전철을 타러 가는데 걸을 수도 없고 어떻게 앉을 수도 없고 막 너무 힘들어 가지고 정말 울며 갔어요."(<우리가 보이나요> 258~259쪽)

영화 <헬프> 속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의 독백이, 그녀가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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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에서 열린 '홍대 분회 집단 해고 철회와 1만인 선언 결의 대회'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이 해고 철회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아직 끝나지 않은 물음...'우리가 보이나요?'

다행히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책으로 엮여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직접 글을 쓴 사람은 따로 있다. 영화 속에서는 백인 작가 지망생인 스키터(엠마 스톤)가, 현실에서는 '한내'라는 출판사가 나섰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할 만큼 두려운 길을 용기를 내어 걸어간 흑인 가정부들, 그리고 역시 누구도 끝을 자신할 수 없었을 험난한 길을 기꺼이 선택했던 청소 경비 노동자들이 바로 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소장님이 뭐라면 '예' 했다는데 지금은 소장님 한 분이 '아줌마' 그러니까 '아니 왜 아줌마라고 하냐고, 아줌마라 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면 좋지 않으냐'고 누가 옆에서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그래 저게 바로 우리의 힘이다' 그렇게 느꼈어요."(<우리가 보이나요> 349쪽)

하지만 그들이 넘어서야 할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그래서 보는 이들에게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겨주면서도 함부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진 않는다. 영화도, 현실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아팠던 건 끝까지 학교 측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줄임) 학교 측에서 너무 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해서 그런지 끝까지 저희하고 대화를 안 했잖아요. 그 부분이 제일 가슴 아팠던 거 같아요. 무시당한 기분. 그런 거 때문에."(<우리가 보이나요> 326~327쪽)

청소 경비 노동자들은 49일에 달하는 힘겨운 농성 끝에 '원직 복직과 단체협약 체결, 임금 및 근로 조건 개선' 등의 합의를 이뤘다. 하지만, 며칠 뒤 대학 측은 간부들을 대상으로 약 2억 8000만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교직원들이 농성장을 감시하며 시켜 먹은 야식 영수증까지 모조리 첨부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에이블린은 말한다. "내 삶이 어떤지 그 전엔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고. 그리고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대한민국의 청소 경비 노동자들은 세상을 향해 묻는다. '우리가 보이느냐'고.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질문이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훗날 그 영화를 보게 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야만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우리들을 몹시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발길이 닿는 거의 모든 곳에서 매일같이 그들과 부딪히고 있으니 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와 산하 기관의 비정규직 노동자 2800여 명을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차례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서울시장이 모든 일을 다 해결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는 일은 마땅히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더 늦기 전에,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란다. 늘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온 '청소 경비 노동자'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보이나요> 이승원, 정경원 씀, 한내 펴냄, 2011년 8월, 384쪽, 1만5000원


덧붙이는 글 <우리가 보이나요> 이승원, 정경원 씀, 한내 펴냄, 2011년 8월, 384쪽, 1만5000원
#헬프 #우리가보이나요 #홍익대 #청소경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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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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