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세 대학생', 그에게 한 수 배워야 겠습니다

[공모- 올해의 인물] 한 우물만 파고있는 지명연구가 장세동씨

등록 2011.11.23 10:32수정 2011.12.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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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여덟에도 열심히 공부중이신 장세동 선생님 방통대 농학과 입학하여 다니신다고 합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 변창기

▲ 오십여덟에도 열심히 공부중이신 장세동 선생님 방통대 농학과 입학하여 다니신다고 합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 변창기
세상엔 나쁘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많지만 좋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많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에 대해 응모글을 써보라고 메일이 왔습니다. 그래도 인물인데 뭘 좀 내비칠 게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내가 나를 뽑아 글로 쓴다? 좀 이상할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에 대해 쓰는 것도 그렇구요. 그래서 울산 동구에서 좀 색다른 인물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찾는 인물은 이렇습니다. 만나도 부담없고 사람의 됨됨이가 되어 있는 분, 겸손하면서도 친절한 분, 겉모양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분, 겉치레보다 정직하고 진실함을 좋아하는 분, 자신보다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아는 분, 어떤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분, 누가 뭐라든간에 남 흉내내지 않고 자기자신으로 살아가는 분, 저는 그런 인생관을 가진 분을 찾기로 했습니다.

 

지난 19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저는 그런 분을 만났습니다. '더블어 숲'에서 추진한 산행에서 본 그분은 부리부리한 눈, 꾸미지 않은 모습, 해박한 지식, 자신보다 남을 위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분 성함은 장세동. 1953년생으로 58세 된 분이었습니다. 이미 저는 장세동이란 이름을 듣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 주변으로 진보성향을 가진 지인들이 많은데 지인들과 만나 대화하다 보면 장세동이란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적이 드물 정도로 이름만 많이 들어 왔습니다.(사실, 처음엔 전두환 정권시절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던 그 실세와 동명이라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장세동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길래?'

 

지인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제 마음에 궁금증은 자꾸만 더해갔지만 그분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바쁜 분이라 여겼습니다. 그런 분을 울산 동구 남목 옥류천에서 열린 역사공부하며 걷기 행사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장세동 선생님이 해설사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장세동 선생님은 제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초등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작은 꽃집을 운영하고 계신데 만나 뵈려고 여러번 시도 했으나 번번히 그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랑 인연이 없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찾아가지 않았는데 우연히 옥류천 산행에서 뵌 것입니다.

 

주변 지인들에게 듣기만 한 '그분'... 우연히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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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연구에 관한 자료 울산에서 아니 전국에서 유명한 지명연구가로 알려진 장세동 선생님 책장입니다. ⓒ 변창기

▲ 지명연구에 관한 자료 울산에서 아니 전국에서 유명한 지명연구가로 알려진 장세동 선생님 책장입니다. ⓒ 변창기

장 선생님은 걸쭉한 입담으로 옥류천 일대를 돌며 지명과 그 지명의 유래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기 쉽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장 선생님과 그렇게 만난 후 그분에 대해 더욱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분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지난 21일 월요일 아침, 학교에 출근해 운동장을 돌며 쓰레기를 빨리 줍고는 잠시 시간을 내어 장 선생님이 운영하는 꽃집을 찾아 갔습니다.

 

"나에 대해 내보냈다가 괜히 욕먹는 거 아닙니까?"

 

마침, 꽃집 안에 장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들어가 인사하고 장 선생님 사는이야기 좀 올리고 싶다고 하니 대뜸 그렇게 말하시네요. 속으로 '역시 이분은 마음 됨됨이가 되신 분이시네'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빈 시험지 종이 몇 장과 볼펜을 들고 가 의자에 앉아 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향이 어딘지부터 물어 보았습니다.

 

"저는 울산 동구 일산동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초등학교지만 그때는 화진국민학교를 나왔지요. 이 국민학교란 말을 쓰면 안됩니다. 황국시민을 줄여 쓴 말입니다"

 

장 선생님은 울산 동구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초·중·고를 나와 지금까지도 울산에서 살고 있다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몇 년 지내다 1974년에 입대를 했어요. 그 땐 군인이 부족할 때라 처음에 일반병으로 입대를 했는데 하사관 시험을 보라해서 하사관 시험을 보고 하사관으로 군생활 하다가 다시 예비군 중대장이 부족하다하여 교육받고 소위로 예편했지요. 1977년 2월 군 제대후 1981년까지 예비군 중대장을 했지요"

 

장 선생님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손 위 형님이 계셨는데 그 형님이 정치인이어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합니다. 1982년 전두환 정권 당시 정치인이던 그 형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 후 형님이 하던 건설업체를 이어받아 해보았으나 사업 실패로 이어져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984년이었어요. 어느날 울산 사람이던 최형우라는 분이 독일 기자가 찍은 비디오를 보자고 해서 얼마전 동구청장을 지낸 정아무개씨와 같이 보게 된 겁니다. 광주항쟁 비디오였어요. 그 땐 전두환 정권 때니깐 살벌했어요. 그래서 몰래 모여 보았던거죠. 그걸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 때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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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연구에 큰 도움 된 책 장 선생님은 위 책을 보면서 지명사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합니다. 이 귀한 자료들은 모두 어렵게 구했다 합니다. ⓒ 변창기

▲ 지명연구에 큰 도움 된 책 장 선생님은 위 책을 보면서 지명사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합니다. 이 귀한 자료들은 모두 어렵게 구했다 합니다. ⓒ 변창기

당시 평민당 소속이던 분들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정치구조와 흐름이 바뀌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는지 정아무개씨는 정몽준 따라 한나라당 가고, 저는 그냥 진보적 성향의 인사들과 민노당에 들어가 아직까지 눌러 있는 거지요. 저는 이곳저곳 다니는 게 성미에 안맞아요. 진득허니 눌러앉아 있는 게 좋은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요즈음 진보진영의 분열이 씁쓸해요. 왜 이런말이 있잖아요.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

 

장 선생님은 갈라지는 진보진영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민노당에 대해서도 불만은 있으나 그래도 아직 야당이니까 붙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장 선생님은 자신의 정치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제가 1991년에 울산시의원에 출마했는데 124표 차로 떨어졌어요. 2년후 당선자 김아무개씨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보궐선거를 했는데 또 한 곳에서 몰표가 나와 낙선 했지요. 그러다 3번째 출마하여 1995년에 2대 울산시 의원에 당선되었어요. 그러다 1997년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울산광역시 의원도 해보고 동구 의원도 하게 되었지요. 광역시 승격 바람에 광역시 초대의원과 동구 초대의원을 동시에 해본 거죠"

 

지난 2002년에 다시 4번째 도전하여 구의원에 당선됩니다. 2006년까지 구의원 활동을 하게 된 후부턴 다시 낙선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두 번이나 당선되어 우리지역 주민들에게 상당히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지역주민에게 도움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고 찾다보니 문화쪽 일이 좋겠다 싶었어요. 풀뿌리가 되면서 각 구별로 문화원이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시기였어요. 그래, 우리지역 문화에 대해 알리는 역할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지요. 문화 전도사 역할을 한번 해보자 하고 시작하게 된게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뿌리말까지 찾으며 지명연구에 심혈... "미흡한 문화재 행정 아쉬워"
 

초기에 문화원 추진위 사무국장을 맡아 하면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든 한 생각이 '지명연구'였다 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구지역 지명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하나 둘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합니다. "문화연구가 자신의 체질에 딱 맞 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도서관까지 뒤져서 자료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렇게 연구하다보니 옛 지명과 이야기 그리고 말에 대해 하나 둘 이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양주동의 고가연구'와 그 뒤에 나온 참고문헌을 찾아 다시 자료를 수집하고 그러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도 만나게 되었고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장 선생님은 그런 귀한 자료를 보면서 지명연구에 파고 들었습니다.

 

"이 지명연구를 하다보니 옛 말의 뿌리말을 찾아야겠더라고요. 그 뿌리말을 모르고서는 지금의 언어로 되어있는 지명의 본래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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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자회 한 쪽 중종 때 최세진 학자가 만들었다는 그 훈몽자회 한 쪽. 한자를 써놓고 그 옆에다 한글로 토를 달아 두었습니다. 하늘천이 그때는 하날텬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텬이 천으로 바뀐 것입니다. 장 선생님은 이를 보고 지명연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합니다. ⓒ 변창기

▲ 훈몽자회 한 쪽 중종 때 최세진 학자가 만들었다는 그 훈몽자회 한 쪽. 한자를 써놓고 그 옆에다 한글로 토를 달아 두었습니다. 하늘천이 그때는 하날텬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텬이 천으로 바뀐 것입니다. 장 선생님은 이를 보고 지명연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합니다. ⓒ 변창기

장 선생님은 어렵사리 '훈몽자회'라는 책을 한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통째 복사해 책으로 엮어 보며 연구해 나갔습니다. 훈몽자회란 책자는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한자교본'이란 뜻으로 중종(1506년~1554년)때 최세진 이라는 학자가 만든 한자교본이었습니다. 훈몽자회는 한자 옆에다 한글로 한자 뜻을 작게 적어 놓은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접하고서야 옛 지명과 오늘날의 지명에 대해 스르르 열쇠가 풀리는 듯 풀려 나갔다 합니다. 그 책자는 일본에도 보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자료도 모으고 알아 낸 것에 대해 <울산 동구 지명과 문화이야기>란 책으로 펴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역 일간신문에도 문화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신문에 글이 나간후 어느 교장과 대학교수로부터 전화도 받았다 합니다. "어떻게 공부했길래 그렇게 상세하게 잘 아시냐"고 물어 보더랍니다. 문화연구를 하면서 가장 보람있었던 일이 있었을까요? 장 선생님이 말해주셨습니다.

 

"지금 80살 정도 되시는 분들 중 울산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있었어요. 어떻게 해서 그분들과 연결되어 교류가 시작되었어요. 2003년 일인데 일본 오까야마 히나세란 동네 분들 중 그런 분들이 계셨지요. 그래서 그 쪽 학교와 우리동네학교 학생 간 서로 왔다갔다하며 친분을 쌓고자 했으나 예산 문제로 그만 두었어요. 그래서 문화원 차원에서 교류를 시작하는게 맞다싶어 그렇게 교류를 시작했어요. 저도 그 때 일본을 두어차례 다녀오기도 했어요. 교류차 일본을 방문 했을 때, 어느 일본 분이 옛 울산 사진을 선물로 주더라고요. 귀한 자료라 그냥 묵히기엔 아까워서 울산지역신문에 '옛 사진으로 보는 울산이야기'와 '울산 옛 풍경 속으로'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연재해 왔어요. 그 때 그 일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여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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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에 한 쪽을 장식한 장 선생님 글 장 선생님은 지역일간신문에 지명에 대한 역사와 흐름에 대해 알기 쉽게 써서 기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 변창기

▲ 지역신문에 한 쪽을 장식한 장 선생님 글 장 선생님은 지역일간신문에 지명에 대한 역사와 흐름에 대해 알기 쉽게 써서 기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 변창기
장 선생님은 아직 더 배울 게 많다면서 얼마전 방통대에 입학했다 합니다. 농학과에 입학하여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꽃집에 문열고 들어 갔을 때도 책을 펴놓고 공부중이었습니다. 얼마 후면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식지않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저도 한수 배워야 할 태도였습니다.

 

"문화를 개발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심각하리만큼 많이 훼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지자체들이 곳곳을 다 파헤치고 있어요. 이래선 안됩니다. 문화를 취급하는 공무원들이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요. 문화는 한 번 훼손되면 복원이 불가합니다. 이에 전문가들이 모여 머릴 맞대고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격언은 가슴을 울리는 말입니다. 애향심을 고취시켜야 해요. 문화는 유형과 무형이 있잖아요. 지명은 무형에 속하는 문화에 가까워요. 제대로 이해하고 보존하여 지역주민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그 고장 사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문화정책도 나오는 겁니다. 국가 행정실에 문화공간을 두어서 자료를 비치해 언제든지 마을 주민이 와서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유형문화재도 중요하지만 무형문화재도 중요해요. 전설이나 설화, 옛이야기 이런 것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분이 돌아가시면 영영 알 수 없게 되잖아요. 그런 부분을 채록도 하고 복원기록도 해서 이어가는 게 중요해요"

 

"제가 지명연구를 하다보니 유형문화재는 어느정도 신경을 쓰고 있는데 이 무형문화재에 대해서 귀한 줄 모르는거 같아요. 어찌보면 유형의 자산보다 이 무형의 자산이 더 귀한데 말이지요. 우리의 무형문화도 복원하고 보존할 가치있는 문화재가 많은데 행정이 엉뚱한데 쏠리고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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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꽂이 책꽃이가 두 개 있었고 모두 지명과 지역사 연구에 관한 자료들이었습니다. ⓒ 변창기

▲ 두 번째 책꽂이 책꽃이가 두 개 있었고 모두 지명과 지역사 연구에 관한 자료들이었습니다. ⓒ 변창기
지명연구에 대해 그리고 문화에 대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어보니 그렇게 답변을 주셨습니다. "내 살아보니 한구덩이만 파는 게 좋겠더라"며 지명연구와 지역사 연구에 한평생 바칠 요량으로 살고 계시는 장세동 선생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타는 열정으로 공부와 연구에 열중하고 가진 것 없이 살아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으며 소탈하고 소박한 성격을 가진 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을 나누어 주려는 삶의 태도와 자세, 마음가짐에서 저는 장 선생님의 성품을 엿보았습니다. 방치되어 있는 우리의 옛 지명과 말의 유래를 찾고 연구하여 다시 복원시키고 있는 장세동 선생님. 우직하게 한우물만 파고드는 지명연구가 장 선생님을 저는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로 적합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 공모 자세히 보기
덧붙이는 글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 응모글입니다.
#장세동 #울산 동구 #지명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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