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이집트에 혼란이 올까

[이집트 현지] 군최고위, 28일 국회의원 선거 강행... 시위대와 경찰 대치로 혼란

등록 2011.11.23 14:42수정 2011.11.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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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떠나갔다. 미처 오지 못한 아이들을 더 기다리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실리면 실리는 대로, 떨구어지면 또 그대로 버스는 그저 허둥지둥 달려갈 뿐이었다. 이른 아침 말없이 아파트단지 앞 길 끝으로 사라졌다가 늦은 오후, 그러나 석양이 내리기 전에 원래의 자리에다 아이들을 내려놓는 스쿨버스의 뒷모습은 학교에 아이들을 맡긴 우리 학부모들의 마음과도 같았다.

불안스러웠다가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가 마침내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현실에의 자각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불가항력의 상황들은 어느새 이집트 도시민들을 끊어낼 수 없는 덩굴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아침마다 우리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울 것인지 집에 데리고 있을 것인지를 두고 갈등하고 있다.

11월 19일, 타흐리르광장에 5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같은 날 지중해 연안도시이며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도 3만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집트 각 도시의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군최고위원회 탄타위 의장의 퇴진과 에삼 샤라프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다. 탄타위 의장은 호스니 무바락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기에 그는 혁명 후 늘 야권과 시민들과 외신들의 의심과 견제를 받았다. 에삼 샤라프 총리의 경우는 군최고위원회 앞에서 종이병풍처럼 무력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샤라프 총리가 취임 후 이룬 업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집트 국민은 눈을 씻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시민저항이 거세질지도 모른다는 예측은 목요일인 지난 17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8일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나는 OO다큐멘타리를 찍는 모 방송국 촬영팀의 통역이었다. 예기치 않게 또다시 시민항쟁의 중심으로 떠밀려 들어갔지만 우리가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없었다. 다만 겨울비가 내렸고 도시의 배수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탓에 교통체증은 극심하여 만 하루 동안에 우리들이 도시 안에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매우 제한적이다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그리고 격전의 19일에 나는 이미 촬영팀과 함께 카이로로 돌아와 있었다. 카이로의 중심인 타흐리르광장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모든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그 일대를 탈출하려는 차량들이 분주하게 줄을 섰기 때문이었다. 카이로시의 도로시스템은 대단히 간단하여 나일강 건너의 지역인 도끼, 자말렉, 무한데신 등에서 나일강 이쪽인 람쎄스역이나 공항으로 가고자 할 경우 반드시 타흐리르를 통과해야만 한다.

나일강 다리는 아직 건너지도 못했는데 나의 귀에는 이미 벌써 '총격' '사상자' '유혈충돌' 같은 단어들이 들려왔다. 겨울이라 일몰도 코 앞이었다. 머잖아 어둠이 내리면 타흐리르일대는 또다시 충돌과 저항의 장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나일강 다리를 건너지 않기로 했다. 카이로를 벗어나 기자까지 가서 외곽도로를 탔다. 그리고 카이로 북부에 위치한 공항지역인 헬리오폴리스까지 동부사막을 이용했고, 위성도시인 뉴 카이로 시를 통과했다. 카이로 시내에서 헬리오폴리스의 호텔에 도착하는데에 소요된 시간은 무려 두 시간이 넘었다.


다음날 조간에 19일 밤의 시위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상자는 무려 5백여 명이라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나는 20일 촬영까지 마치고 2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틀 후, 대형수퍼몰에는 비상물품 구비하려는 소비자들로 장사진


11월 21일, 여느 날 아침처럼 그날도 나는 우리 아이들과 스쿨버스를 기다리며 단지 앞에 섰다. 하지만 스쿨버스를 타려는 길에서는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현저하게 줄었고, 병사들을 가득 태운 군용트럭들이 헬리오폴리스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헐레벌떡 왔다가 쏜살같이 달아나는 스쿨버스들에도 탑승한 학생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여권, 출생증명서, 재학증명서는 필수야!"

군장교들이 주민들의 태반을 차지하는 우리 아파트단지 내에서 나는 평소 가까이 지내는 부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서로 무엇이 당장 갖추어져야 하는지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그들의 모습은 '비상시에'가 아니라 '여차하면'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향후 이집트의 정국이 지난 1월 혁명과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있었던 터라 나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집트에 남아 있는 몇몇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로를 염려하고 주의를 주는 지인들과의 통화는 와중에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차분하게 정보를 교환했다. 이미 대형수퍼몰들은 비상물품을 구비해 두려는 소비자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중의 일부가 되었다.

모두가 느슨했다

11월 28일 이집트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하지만 지난 1월 혁명 직후 들어선 군최고위원회가 국민들과 한 약속은 이것이 아니었다. 헌법개정,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대통령선거까지 모두 올해 안에, 아니 올 11월 안에 끝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만한 정치적 기반을 가진 인물도 찾기 어려웠고, 설사 그러한 인물이 등장한다 해도 그를 지지해줄 지지층이 탄탄해지고 또 그들이 번듯한 정당으로 꾸며지기까지 열 달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타흐리르광장의 혁명가들이 누군가가 조장한 종교갈등과 야권끼리의 의견의 불일치와 견제 등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군최고위원회는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2013년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군최고위원회의 발표에 혁명가들은 뒤통수를 맞은 양 충격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군최고위원회를 믿었고, 혁명의 정신을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2년 4월을 절대로 넘길 수 없다"

타흐리르의 혁명가들이 제시한 이 요구는 11월 19일 유혈충돌의 도화선이 되었다. 국민들도 이렇게 질식할 것 같은 상태로 앞으로 2년을 더 눌려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입장이어서 혁명가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일단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에삼 샤라프 총리와 그의 내각은 사표를 제출했다. 군최고위원회는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였고 차기 총리감을 '급하게' 찾고 있다. 현재 군최고위원회는 11월 28일 선거를 그대로 치르겠다는 강경 입장이고, 혁명가들은 '제대로 계획을 정리하지 않으면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선거를 치르든 연기하든 지금의 이 국내 분위기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지난 1월 같은 혼란이 다시 올까.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아침 막내 딸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우지 않을 결심이 섰다. 어제 오후 그 학교 부근이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로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믿을 만한 소식통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에도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에도 실립니다
#이집트민주화 #타흐리르광장 #백만명행진 #서주선생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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