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만인소.
한국독립운동사 정보 시스템
선비들이 시장개방에 반대한 것은 그들이 세계정세에 어두워서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청나라가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시장개방 때문에 서양열강에게 경제적 침탈을 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서양열강에 대한 문호개방이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기브'뿐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서양의 시장은 사실상 개방되지 않고 동양의 시장만 활짝 개방되었으니, 이것은 누가 봐도 '주고받기'가 아니라 그냥 '주기'에 불과했다.
선비들을 비롯한 전 국민이 강력히 반대했지만, 이명복 주상은 청나라의 도움과 중재를 빌려 고종 19년 4월 6일(1882년 5월 22일)에 대미(對美) 시장개방을 끝내 관철시켰다. 이 날, 조선의 시장개방을 핵심 골자로 하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미국 쪽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조약은 미국 상인이 조선에서 치외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이 조약으로 개방된 것은 '양국의 시장'이 아니라 '조선의 시장'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명복 주상은 이 조약이 국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조약 제1조가 장차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제1조에서는 한·미 양국 중 한쪽이 제3국의 부당한 침해를 받을 때는 다른 한쪽이 신속히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명복 주상이 국민적 반대를 무시하고 미국을 끌어들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미국에 시장을 내주더라도, 위급할 때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조선으로서는 득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미 시장개방을 반대하는 백성들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랴!'이명복 주상 '어리석었다'... 2가지 사례를 보자하지만, 그 후의 사건 전개를 보면 이명복 주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냥 시장만 개방했을 뿐,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2가지 사례가 그 점을 입증한다.
첫째, 미국은 "청나라를 견제해달라"는 이명복 주상의 호소를 뿌리쳤다. 1882년에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사상 최고로 극대화되었다. 거기에다가 그 직후 발발한 임오군란이 청나라의 영향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이명복 주상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를 이용해서 반군을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화를 초래했다.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청나라군이 '지원군'에서 '점령군'으로 돌변한 것이다. 한성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군은 조선 정부를 압박하는 흉기가 되었다.
조선 주재 책임자인 원세개(위안스카이)의 극심한 내정간섭이 국제적 지탄을 불러온 사실에서 잘 나타나듯이, 1882년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자율성을 존중하던 기존 관례를 무시하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 학계에서는 1882~1894년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청나라가 갑작스레 돌변하자, 이명복 주상은 미국에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의거한 조치였다. 이명복 주상이 고종 20년 6월 5일(1883년 7월 8일)에 전권대신 민영익을 미국에 파견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민영익을 통해 미국의 힘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좋게 봤던 미국은 통상조약 제1조를 가차 없이 무시했다. 조선 문제에 대한 개입을 거부한 것이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다 똑같은 오랑캐입니다"라는 경상도 선비들의 주장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믿었던 미국이 배신하자, 이명복 주상은 이번에는 러시아로 고개를 돌렸다. 김옥균·박영효·민영익·김관선 등을 파견해서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물이 1884년 한·러 수호통상조약이었다. 청나라가 돌변하고 미국이 배신하니까, 청나라·미국이 싫어하는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