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김종성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사대부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면, 세종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두고두고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고 칭송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순'은 고대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요임금과 순임금으로서, 예로부터 대대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선 사대부들이 세종을 동방의 요순으로 떠받든 것은, 무엇보다도 세종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 양반들이 전직 사또를 위해 송덕비를 세워주는 것은, 전직 사또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았을 것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침해했다면, 사대부들이 세종을 해동요순으로 극찬하는 일은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가 사대부의 기득권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안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대부들도 감탄하게 만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사실,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훈민정음을 수긍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반감을 표출했지만, 얼마 안 있어 그들도 훈민정음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가 있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가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 권16에서 "(훈민정음이) 소리를 글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면서 "사람들은 창힐(倉詰)과 주(籒)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창힐'과 '주'는 고대 중국에서 문자 제작에 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 이래로 이런 훌륭한 글자를 만든 것은 처음이라며 세종 당시의 사람들도 감탄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대부들도 중국 글자만 갖고는 문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사대부들도 얼마 안 있어 훈민정음을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선비들은 언문 해설서를 옆에 두고 한문 서적을 공부하곤 했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장가인 어우당 유몽인은 중국 역사서인 <십구사략>을 배울 때 문장 해석이 잘되지 않아서 "언문 해석을 참조했다"고 저서인 <어우야담>에서 회고한 바 있다. 유몽인 같은 대가도 언문 해석을 보면서 한문 서적을 배웠다면, 여타 선비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에까지 이두를 섞어서 사용조선시대 사람들이 한자만 갖고는 독해는 물론 작문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은, 관청에서 작성한 혹은 관청에 제출된 공식 문서에서 이두가 사용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자만 갖고 작문할 경우에는 자칫 '콩글리쉬'가 되기 쉽기 때문에 한자 중간 중간에 이두를 삽입했던 것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관청에 제출된 노비매매 문서의 서두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오른쪽 약정서가 하고자 하는 바는 ……입니다"(右明文爲臥乎事叱段 ……)란 구절이다.
이 구절이 순전히 한문인 줄 알고 옥편을 뒤적이며 해석할 경우,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른쪽 약정서'(右明文) 뒤에 나오는 '위와호사질단'(爲臥乎事叱段)은 고대 한문에도 없었고 현대 중국어에도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2개의 이두 단어인 '하고자 하는 바'(爲臥乎事)와 '는(은)'(叱段)이 합쳐진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자 작문에 곤란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에까지 이두를 섞어서 사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