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하고 나니, 시어머니도 달라보여요

[잘 찍은 쉼표 하나④] 노동자 평생교육원 구상 중인 김숙희씨

등록 2011.12.13 14:36수정 2011.12.1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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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특급열차에 타지만, 이젠 자신이 무엇을 찾아 그리도 헤매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바쁜 일상이다. 눈 뜨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휴, 월요일이네' 한숨 쉬기가 무섭게 주말을 맞는다. 그렇게 1년, 2년 세월이 쌓이면 뒤돌아보기 두려워 다시 앞만 바라본다. 광고 속 카드회사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소비를 부추기지만 정작 떠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카드회사가 돈 버는 게 싫어서? 꼭 그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여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인생과 일상에도 쉼표가 필요하다는 게다. '슬로 라이프'의 창시자, 쓰지 신이치의 <행복한 경제학>에 소개된 인디오들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유적 발굴 탐험가들에 고용돼 따라가던 인디오들은 정글을 앞두고 아무 말 없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탐험가들이 급료를 높여주겠다고 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총으로 협박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이들은 갑자기 일어나서 짐을 등에 지고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인디오들은 말했다.

"너무 빨리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바쁘게 일하는 당신에게도 필요한 말이다. 연말을 맞아 잘 못 쉬는 독자들을 대신해 잘 쉬는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소개하는 다섯 고수들의 다양한 쉼에서 힌트를 얻어 2012년, 당신으로부터 '잘 찍은 쉼표 하나'를 소개받길 기대한다. - 기자말

* 김숙희 서울노동광장 교육위원의 시점으로 인터뷰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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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교육 전문가로 활동중인 김숙희 서울노동광장 교육위원 ⓒ 노동세상


대학 때 내 꿈은 선생님이었어요. 전공은 독어독문이었지만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들었던 이유였죠. 그로부터 20년, 다시 내 꿈은 '선생님'으로 돌아왔네요. 노동자평생학습원을 만들어 그곳을 드나드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안내자가 되고 싶거든요. 교단에서 강의하는 사람만 선생님인가요? 마흔 살 김숙희는 앞으로 삶의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주고받을 생생한 교육을 꿈꾸고 있어요. 이제 제 꿈 자랑 좀 해보렵니다.

인생 후반기를 위해 수입을 내려놓다


"당신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언제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난 "서른다섯 전후"였다고 대답할래요. 그때 처음으로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살까 고민했거든요. 그리고선 결단을 내렸죠. 가난을 선택하기로.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던 오랜 노동조합 간부활동을 마치고 노동교육단체 상근활동가로 거듭났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그래서 마음을 먹기까지 1년 반이나 걸렸어요. 노동조합 활동도 노동운동에 이바지하는 것이지만 인생 후반기는 좀 더 '노동교육'에 초점을 맞춰 전문적인 활동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거듭하던 번뇌를 끊고 상근 수입에 맞춰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죠.

그렇게 노동교육단체에서 3~4년 활동했습니다. 참여형 직장인 교육을 열심히 했죠. 계속 교육을 하다 보니 관심의 폭이 계속 넓어지더군요. 노동인권교육, 성격분석, 자신감교육 등등. 기본적으로 성인교육은 평생교육이 돼야한다는 가치관도 섰고요. 좀 더 전문성을 쌓아야 할 필요도 느꼈죠. 그래서 작년에 그 자체가 '평생교육'을 표방하는 방송통신대 교육학과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2년 만에 졸업해서 구립도서관, 평생학습원 등에 취직이 가능한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따자는 목표도 세웠고요.

평생교육이란 초중고 학교교육을 제외한 다른 영역의 교육 모두를 아우르죠. 유아부터 아동, 성인, 노인교육까지 모든 세대에 걸친 교육을 뜻해요. 그런데 현재 있는 대부분의 평생학습원은 문화취미강좌 중심의 교육들만 하고 있는 한계가 있어요. 아동 책대여, 중고등학생 대상 열람실 운영, 주부 대상 여가프로그램 이상의 프로그램이 없어요.

그와 함께 현재 노동교육의 부족함도 보이더군요. 노동 교육이 주로 조합원들만 대상으로 하는데 사실 지역에서 만나는 주민들 모두가 일만 하면 노동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분들에게 노동인권, 노동법 등 노동자의 권리를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평생학습원' 구상의 시작이었습니다.

2년 만에 '자격증의 여왕'에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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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희 교육위원은 지난 9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에서 주관한 제1회 시민교육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탄 서울노동광장의 '청년노동자학교'를 기획하기도 했다. ⓒ 노동세상

구상은 실행에 옮겨야 하는 법. 지난 2년 동안 정말 바빴습니다. 이미 갖고 있던 성희롱교육전문강사, 직업상담사 자격증에 이어 애니어그램과 MBTI성격유형 전문강사 과정도 들었고 심리상담사과정을 밟으려고 해요. 한국코치협회에서 하는 코치교육도 받았어요. 코칭이 뭐냐고요? 매년 우리는 새해가 되면 올해는 책을 많이 읽어야 겠다, 뭘 배워야겠다 결심을 하지만 작심3일이 되기 쉽죠. 그런데 누가 옆에서 계속적인 상담을 통해 나한테 필요한 게 뭔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한 후 함께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게끔 일상적으로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걸 코칭이라고 해요.

자기주도학습지도사, 경제놀이교육전문강사 과정도 들었죠.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라는 고민 때문에요. 입시성적을 높이기 위한 자기주도학습이 아니라 아이들의 꿈에 맞춰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할 수 있게끔 도움이 되려고요. 심리상담사과정을 끝마친 후엔 노인지도사과정도 들을 예정이에요. 나도 나이 들어가지만 퇴직 후 노동자들의 삶도 고민해야 하니까요. '노동자교육이 노동조합교육만 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했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아이들 교육에서 노인의 삶까지 와버렸네요. 꼭 '자격증의 여왕'에 도전하는 것 같죠? 사실 앞에 열거한 과정들은 시간과 돈만 투여하면 다 딸 수 있어요. 그나마 드문드문 강의를 해서 수강비를 메우고 있죠.

이렇게 준비해서 어떤 노동자평생학습원을 만들고 싶냐고요? 한 노동자의 평생학습을 도와주는 장소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노동자평생교육원을 찾는 이용객들 각자에 맞춘 맞춤식 교육을 해주는 거죠. 그에게 필요한 교육은 뭔지 같이 고민하고 계획세우고 적절한 시기 때마다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알려주고. 만약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노동자라면 노인복지에 대한 교육을 같이 하고, 부부관계에 고민이 많다면 부부가 소통하는 방식도 일러주고요. 우리집 주변에 일상적으로 이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가서 노동인권교육도 듣고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는 법도 익히고. 아직은 두루뭉술하게 거친 그림만 그려놓은 상태이지만 꼭 해보려고 해요.

시어머니도 달라보여요

올해 1년 각종 교육 들으러 다니느라 사무실을 비울 때가 많았어요. 혹자는 잘 쉬고 있냐고 묻던데 좀 억울해요. 평일에도 오전, 오후 때맞춰 강좌 듣고, 시험보거나 또 다른 강좌 찾아다니느라 주말에도 집을 비우는 때가 많거든요. 집에선 초등학생 아들이 토, 일요일에도 만날 나간다고 볼멘소리를 하고요. 그래서 미안하긴 한데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아하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깊이 있게 보게 됐어요.

함께 사는 시어머니도 달리 보이죠. 예전엔 가족 중 한 명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머니께 필요한 교육이 뭘까, 고민하게 돼요. 이런 시도를 안 했으면 어머니가 쇄약해지는 것도 못 봤겠죠. 어머니의 지혜를 내 아이에게 어떻게 전달할까도 고민하게 됐고요. 주말에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요. 나는 시험공부를 하고 아이는 옆에서 만화책을 보고. 그래도 엄마가 공부하는 걸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의지로 하는 공부는 억지로 하는 공부와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땐 이렇게 배운 걸 어떻게 세상에 기여하게 할 까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금 하는 공부 하나하나가 다 노동자평생교육원을 만드는 데 영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공부하는 게 신나요. 세상에 이롭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계속 스스로에게 자기 최면을 걸고 있죠. 일은 쉬지만 몸은 바쁜, 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운 나의 40대 첫해가 벌써 끝나가네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노동세상>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노동세상>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잘 찍은 쉼표 하나 #노동자평생학습원 #김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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