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 재건마을포이동 재건마을 전경. 사진 오른쪽에 있는 조립식 가건물이 화재 이후 새로 지은 집의 모습이다.
구태우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자리에 불안한 희망이 피었다. 지난 6월 12일 발생한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 서울시 강남구 개포4동 1266번지에 조립식 건물 51채가 지어졌다.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 포이동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시민과 시민단체들이 힘을 합친 결과다.
집을 짓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집을 짓기 시작하면 철거업체 직원들이 몰려와 해머로 부숴버렸다. 이 과정을 5번 반복한 끝에 포이동 재건마을(구룡마을) 주민들은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상하수도, 난방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은 집이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포이동 주민들에겐 타워팰리스 못지 않은 집이었다.
포이동 판자촌은 1981년 만들어졌다. 정부가 도시 빈민을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이주시켜 만들어진 빈민촌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행정구역이 개포동 1266번지로 변경됐다. 자기 땅이 아닌 곳에 모여 살던 빈민들은 '불법점유자'가 돼 주민등록도 말소됐다. 강남구청은 "서울시에서 1981년 개포택지개발사업을 시행하고 남은 공유지이기 때문에 주민 전입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주민들은 주민등록도 하지 못한 채 '무적자'로 살았다. 주민들은 오랫동안 자활근로대증과 세금납부확인증 등을 제출하며 강남구에 주민번호 복원과 등재를 요구했다. 하지만 강남구는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2009년 6월 대법원은 "30일 이상 거주 목적으로 살고 있다면 주민등록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렇게 포이동 빈민들은 28년 만에 '강남주민'으로 인정됐다. 그렇다고 봄이 온 게 아니다. '공유지 불법점유자'가 된 주민들에게는 엄청난 금액의 벌금이 부과됐다.
강남에 있는 판자촌. 포이동 재건마을을 지난 11일 찾았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포이동 주민들은 새 집 청소로 분주했다. 냉장고 선반을 씻고 있던 서아무개(56)씨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개인화장실이 생겼다"며 "아직 상하수도시설이 없어 못 쓰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말했다. 화재 이후 서씨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화재 탓에 집을 잃은 74가구의 주민들은 지난 6개월 동안 21가구에서 공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화장실 3개를 170여 명의 주민들이 함께 사용했을 만큼 상황이 열악했다.
"화재 이후... 더 불안해졌다""아내가 강남구청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내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만큼 우울증이 심합니다."
강아무개(63)씨의 말이다. 그의 아내인 조아무개(53)씨는 강씨가 알던 예전의 아내가 아니었다. 강제 이주 이후 30년 동안 포이동에서 살던 조씨는 지난 6월 발생한 화재 이후 변해버렸다.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포이동 주민들에게 강남구청은 매몰찼다. 강남구청은 철거업체 직원들을 동반해 총 다섯 번 철거를 시도했다. 지난 9월 29일 새벽 4시에는 강남구청 공무원 10명과 철거업체 직원 30명이 들이닥쳐 가건물 7채를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 4명이 타박상을 입었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강남구청 공무원들의 잇따른 철거 '협박' 탓에 불안에 떨며 지낸다.
강씨의 아내인 조씨는
"지금도 새벽에 쿵소리만 들려도 철거 들어오는 줄 알고 밖으로 뛰어나간다"며 "집이 생겼지만 언제 철거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안정이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조씨는 "집이 불타서 새로 지은 것이 불법인가. 30년 동안 살았으면 포이동 사람들도 강남구 주민이다"라며 "(강남구청은) 주민들의 아픔을 해결하기보다 돈 있는 사람들의 민원만 해결한다"고 성토했다.
화재 이후 불안에 떨며 지내는 것은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 주민들은 불면증과 우울증을 겪고 있거나, 언제 철거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낸다.
한 주민은 "(화재 이전에) 포이동 사람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냈다"며 "하지만 이웃집도 자기집처럼 드나들던 주민들이 화재 이후에 문을 잠그고 지내고, 빈집인 줄 알고 철거당할까봐 낮에도 불을 켜놓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