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딸과의 작별을 준비하면서

등록 2011.12.24 17:25수정 2011.12.2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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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6년간 떨어져 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와 다시 한 지붕아래 살기를 한참했는데 이제 한 달 후면 다시 몇 년간 떨어져 살아야 한다. 그러나 과거 6년 간 떨어져 살았던 날들의 색깔은 아련한 그리움과 갈망과 슬픔의 안개색으로 날마다 감당하기가 힘들었다면, 지금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노랑의 희망찬 색깔이라 잘 견딜 것 같다.


한때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도 이 세상에는 한창 사춘기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이들이 많다. 사춘기가 아닌 장성한 자녀라도 이국땅에 있기에 일 년에 한 번도 못 만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가까이 살아도 마음이 멀어져서 생각조차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사무친 그리움과 간절한 보고픔을 마음에 안고 사느라 속병이 들대로 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몇 년 만에 한 번씩 자식을 만나면 그 만남이 꿈결같이 기쁘고, 미국의 자식이 생각난 김에 몇 달만에 전화를 해도 그저 큰 선물인양 고맙기만하다. 물론 그 기쁨과 고마움 뒤에 다시 허전하고 외로운 감성이 물밀듯이 밀려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부모들도 많겠지만...

한창 사춘기때 6년 간 떨어져 산 아이, 할머니집, 아빠집 여기 저기 떠돌면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순대와 떡볶기를 사서 내게 오던 아이였다. 이곳 저곳 피어싱을 하고 기독교학교에서 빨강양말을 신고 다녀 마치 불량소녀인양 담임과 세상의 오해를 받았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심성이 올곧고 맑은 딸이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에도 가끔 그 딸이 아프지 말라고 밤을 새워 눈물로 묵향을 피워 난초를 그리며 기도를 바쳤던 아이. 졸업장도 안 받고 수능을 치자마자 맨 몸으로 내 곁으로 달려와서 함께 산 지 이제 7년인가 싶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내가 당황했던 것은 아이의 위장병과 그리고 음식을 혼자 먹는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라 나도 오해를 할 뻔 했지만 나중에는 나와 떨어져 사는 6년간 아이가 그렇게 속병이 깊을 정도로 심성을 다치고, 외롭게 혼자서 식판에 밥을 갖고 제 방 책상에 들어가 먹었다는 것을 알고 못난 애미로서 미안해서 많이 울었다.


그 아이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과를 바꾸었다. 확실한 직업이 보장되는 과를 나와 다른 과로 나갈때 반대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열정이 솟아나오고 그 열정의 에너지가 아이를 원래의 아이가 되게 하는 것을 믿어서 무조건 밀어주었다. 아이는 운동으로 손상된 몸을 회복하고 놀라운 집중력과 열정을 발휘하여
대학개교 43년 동안 처음으로 3년만 다니고 최연소 전체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흘렀다. 아이는 2년 동안 스스로 돈을 벌어 배낭여행을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서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도 다녀왔다. 또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여 안정된 직장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누가 보면 중증청각장애 엄마를 두고 분수에 맞지 않게 그렇게 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나 보다. 대학때 항상 모자와 츄리닝만 입고 지냈던 아이가 화장을 하고 잛은 치마를 입고 외출을 자주하니 앞집 할머니까지 이상하게 보았다.

하지만 일요일 이른 아침에 영어시험장에 아이를 태워주던 나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게 다가 아닌 것처럼 아이는 스스로 알게 모르게 시간을 거름삼아 내실을 채우고 필요한 스펙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틈나면 자기강점을 찾아 펼쳐가는 마인드프로그램과 감성역량을 넓히는 프로그램들을 권고하여 연수받게 했다.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에 무언가를 바라기보다 자기자신을 바꾸고 보완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바로 알아가고 마음중심을 잡고 겸손한 것이 우선이고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드디어 그 하늘의 별따기 처럼 어렵다는 대학의 대학원을 합격했다. 아이가 2차 시험을 볼때는 신부님께 미사도 요청하고 제주도의 언니에게도 기도를 요청했다. 아무리 힘든 과정을 아이가 겪는다고 해도 내가 해 줄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힘을 요청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아이가 다니던 지방의 학교 개교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교수는 흥분했다고 한다. 아이는 기숙사를 신청하고 나는 등록금을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또 누군가는 오해할 것이다.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창출도 나오는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까지 앞으로 짧으면 2년 길면 5년이 갈 그 과정동안 수많은 오해의 말들이 난무할 것이다.

단골로 가는 옛날 살았던 동네 약국의 20년 가까이 잘 아는 약사 아줌마와 지난 번에는 큰 딸 시집간 이야기를 하면서 약사 아줌마의 딸이야기도 나누었듯이 이번에도 나누었다. 약사 아줌마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면서 축하한다고 하는데 우연히 약지으러 온 그냥 얼굴만 아는 식당아줌마는 "선생님 참 욕심이 많아요!" 하였다. 

나는 그저 아이가 건강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기를 소망했을 뿐인데... 그것도 욕심이면 욕심이겠지 하고 마음속으로 실소를 했다. 아마도 과외 같은 것을 시키면서 그쪽으로 보낸 치마바람 센 여자인 줄 잘못 알았나 보다

하지만 우리 모녀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인의 말처럼 이미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가까스로 꽃을 피우기 시작헀으니깐. 그리고 그 꽃은 아이만 잘 살기 위해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고 나눔의 기쁨을, 그 기쁨의 숲에서 나오는 산소의 맛을 아이가 조금씩 깨달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스스로 산소가 되어서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산소바이러스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 딸! 이제 좀 있으면 엄마랑 다시 헤어져 살아야 하는구나! 그래도 넌 참 예쁘구 장하구나! 그러나 언제나 엄마가 기도하며 너의 든든한 백이 될터이니 부디 객지에서 맑고 건강하게 꾸준히 잘 해나가렴! 언제나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해내기를 이 엄마는 믿어!"
#엄마와 딸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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