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고프고 목 마르고 갈 곳 없는 새들은 오라

[이란 여행기 58] 정이 넘치는 카샨의 숙소

등록 2011.12.27 13:50수정 2011.12.2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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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카샨 숙소에서 영어를 담당하는 할아버지. 새에게 먹이를 주고, 내게 프로페셔널하다고 했던 할아버지다. ⓒ 김은주


오늘은 아비야네로 가기로 한 날입니다. 숙소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아비야네로 가기 위해 우리 일행은 택시를 대절했습니다. 기사가 오전 8시 30분까지 오기로 했기 때문에  그 전에 아침도 먹어야 하고, 점심으로 먹을 감자도 삶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습니다.

야외 주방엔 이미 손님이 있었습니다. 옥상으로 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옥상바닥에서 모이를 쪼던 새들이 일제히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누군가 옥상 바닥에 새 모이를 뿌려 놓았고 그릇에 물도 받아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새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었고, 새들은 마침 아침을 들고 있었고, 눈치 없는 난 새들의 아침식사를 방해했던 것입니다. 다른 때 같으면 새들이 식사를 다 하도록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배려가 끼어들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바빴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즉석 미역국에 지난 밤 먹다 남긴 밥을 넣어서 죽을 끓였습니다. 그리고 점심으로 먹을 감자를 씻고 있을 때 옥상 문이 열리며 할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이 숙소는 할아버지 형제가 운영하는데 나이가 더 많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어제 처음 숙소를 방문했을 때 우리에게 숙소를 안내하던 정신없는 할아버지의 형입니다. 작은 할아버지가 훨씬 쾌활하게 보인다면 이 할아버지는 조용한 편인데 은근히 사람을 웃기는 구석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백 번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끈기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미세스 할로우 하와이유? 써티 미니츠 에프터 핫 워터.(아줌마, 안녕? 30분 후에 뜨거운 물 나와)"

옥상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어제 우리에게 백 번쯤 한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파자마 차림을 한 채 복도를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 말을 전했습니다. 우리 일행에게 일일이 다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큰 애가 할아버지 앞을 세 번 지나갔는데 지나갈 때마다 녹음된 방송을 틀듯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웃겨 죽겠다고 했습니다.

아군에게 적의 기밀사항을 속삭이는 것 같은 진지하고 심각한 태도로 '차가운 물이 나오니까 30분 후에 샤워를 하라고'하더니 정말 30분이 흐른 후에는 이제 따뜻한 물이 나오니까 샤워를 해도 된다는 말을 또 녹음기를 튼 것처럼 반복했습니다. 할아버지의 태도가 참 순박하게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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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샨 숙소의 옥상. 싱크대도 있고, 식탁도 있어서 여기서 주로 밥을 해먹었다. 또한 이곳은 새들이 모이를 먹고 자는 곳이기도 하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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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키우는 새를 팔에 올려 놓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은 애. 숙소 내에서도 앵무새를 비롯해 몇 마리를 키우고 있을 정도로 할아버지의 새 사랑은 지극했다. ⓒ 김은주


감자를 씻고 있을 때 나타난 할아버지는 바로 그 할아버지였습니다.


"미세스 할로우 하와이유."

어제와 다름없는 인사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옥상에 나온 이유는 새들을 보기 위해서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침 일찍 옥상 바닥에 새 모이를 뿌려놓고 물을 받아놓은 사람은 할아버지였던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새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옥상에는 새 집도 있었습니다. 갇혀있는 새는 없었지만 새 집은 문이 열려 있는 채 쌓여있었습니다. 아마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익명의 새들을 위한 집인 듯 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는 아무나 와서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집 없는 새는 잠도 자고 가라는, 그러니까 옥상은 무한한 자비의 공간이었습니다. 사실 아침에 내가 옥상 문을 열었을 때 옥상 바닥에 총총히 앉았다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의 모습은 새 쇼를 보는 것보다 장관이었는데 이게 모두 할아버지의 새 사랑에서 나온 결과였던 것입니다. 새들에게는 정말 든든한 빽인 할아버지였습니다. 언제든 배가 고프면 찾아갈 곳이 있고, 잘 데 없으면 찾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겠습니까.

할아버지는 내게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미세스 할로우 하와이유?"

상투적인 영어로 먼저 서두를 꺼냈습니다.

"유  리더? (너가 이 팀의 리더냐?)"

이 말을 들었을 때 난 하마터면 너무 큰 소리로 웃을 뻔 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이고 정말 뜻밖의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눈에 내가 이 팀을 이끄는 인물로 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 꽁무니나 쫒아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날 적극적인 사람으로 여긴다는 게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할아버지 눈에 난 매우 프로페셔널했던 모양입니다. 

"난 리더 아니에요. 리더는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날 프로페셔널하고, 리더라고 여겼던 자신의 생각이 절대로 잘못됐을 리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유 프로페셔널. 유 엔지니어? (넌 매우 프로처럼 보인다. 너의 직업은 엔지니어냐?)"

이 질문 또한 나와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어서 리더라고 물었을 때처럼 웃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 엔지니어는 이란에서 인기 직업입니다. 길에서 만난 학생이나 차에서 만난 여학생 중에 미래에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이란 사회에서는 커리어우먼의 대명사인 모양입니다. 이 질문 또한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아니오, 전 하우스와이프(주부)예요"

나의 대답은 할아버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뜨렸습니다. 내가 하우스와이프라고 했는데, 할아버지의 표정을 봐서는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우스와이프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모양입니다. 하우스와이프라는 직업은 엔지니어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직업이라고.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날 프로페셔널한 여자로 한 번 점찍었기 때문에 절대로 그 생각을 바꿀 의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매우 프로페셔널한 여자가 됐습니다.

할아버지의 이 생각이 굳어진 이유가 뭘까, 하고 할아버지가 옥상을 나간 후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모두들 자고 있는데 먼저 나와서 감자를 씻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어제도 애들 밥 해먹이려고 주방으로 쫒아가 냄비를 하나 달라고 떼를 썼는데 아마도 그런 모습도 전문적인 여성이 되는데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엄마는  위대합니다. 새끼 밥 굶을까봐 나름 뛰어다녔는데 그 모습이 나처럼 소심한 여성도 적극적인 여성으로 만드니까요. 세상의 모든 엄마는 다 프로페셔널한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란 여행은 지난 2009년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란 여행은 지난 2009년에 다녀왔습니다.
#캬샨 #숙소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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