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한 마디 "남자도 남자를 믿지 마"

[개인사로 보는 사회사-잊을 수 없는 얼굴들 ③]

등록 2012.01.16 19:04수정 2012.01.1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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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두 살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의 생활 5개월이 내게 끼친 영향은 그 어떤 산보다도 높고, 그 어떤 강보다도 깊고, 그 어떤 바람보다도 거세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표현은 명백하게 과장이지만, 나는 이보다 더욱 강렬한 과장법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한탄한다. 그녀를 생각하면 내 눈에서는 지금도 금방 눈물이 나오려 하고, 귀에서는 노래가 들리고, 코에서는 향기가 맡아진다.


나로서는 어머니 다음으로 깊이 알게 된 여인, 그녀, 정아누나,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절차가 필요했다. 열두 살 나이에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서 집을 나온 사내아이가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버스가 고창에서 광주까지 데려다주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꿈이 있었다. 뭐가 뭔지 당최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 막연하고도 애매한, 그러면서도 두려움 따위는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꿈이 있었다. 당시의 꿈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바보라고 불러주겠다. 왜냐하면 꿈이란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니까.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는 무엇과는 거리가 영 먼 것이니까.

하늘에 별이라도 딸 수 있는 자신감, 악마가 죽인다고 협박해도 무릎 꿇지 않는 무모한 자신감, 그런 것들을 나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어쩌면 그 앞에 '감히'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원도 한도 없이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렇게 막연하면서도 무엇인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꿈을 갖고 있는 자에게 두려움이란 형용모순에 불과하다. 그래서 거침없이 걷는다. 그렇게 걷다가 '양아치'들이라도 만났다면 인생이 또 한 번 방향을 틀었겠지만, 그 어린 나이에 광주 시내를 하루 종일 쏘다니고 있었어도 용케 '양아치'들과는 조우하지 않았다. 볼 것이 너무 많았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생각할 만한 것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 그저 걷고, 또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영사실 조수구함'

나중에 그곳이 무등극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에는 그냥 극장이라고만 생각했다. 어쨌든 영사실과 조수, 그 두 단어는 내게 낯설지 않았다. 시골 면소재지에 들어오는 가설극장을 동네 형들을 따라 몰래 드나들면서 익히 귀에 들렸던 단어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영사실이란 영화를 내보내는 일종의 본부 같은 곳이었다.


그런 본부에 내가 조수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영화는 원도 한도 없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영악한 계산이 금방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번쩍번쩍 빛나는 유리문을 다짜고짜 밀고 들어갔다. 검표원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라는 아주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고, 거칠 것이 없는 나는 영사실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로 그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었다.

"네가? 너는 인마 째깐해서 안 돼. 너 몇 살이냐."

검표원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간 사무실, 그 아저씨가 극장 사장님이었는지 그냥 관리인 계급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머리 벗겨진 남자가 그렇게 조금은 어이없다는 투로, 그리고 조금은 웃기는 놈이라는 투로 킬킬 웃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째깐해서' 안 된다는 말이 내 의지를 단박에 꺾었을까. 천만에 말씀이었다. 안 된다는 그 한 문장에서 나는 즉시 전략수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열두 살이 아니다. 열네 살이다. 아니다 참, 열여섯 살이라고 할까? 아니지, 열여섯 살은 너무 많아 안 믿어줄 수도 있겠다. 대체로 그런 작전계획이 내 머릿속에서 즉각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염치도 좋지. 아니 배짱이라고 할까. 하여튼 뻔뻔한 거짓말이 내 입에서 술술 잘도 나와 주었고, 어떻게 그런 매달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애원에 사정에 안달복달까지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마침내 반승낙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극장 사장님인지 단순한 관리자인지 알 수 없는 그 아저씨가 고용계약이랄까, 근무조건이랄까, 그런 것들을 말하고는 이래도 할래? 하고 있었다.

월급은 없고 밥은 아침에만, 점심은 라면, 저녁은 국수

숙식은 제공하되 월급은 없고, 밥은 아침에만 한 끼 있고, 점심은 라면, 저녁은 국수를 먹는데 라면과 국수는 본인이 끓여먹는다. 이것이 그 아저씨가 말한 고용계약 내지는 근무조건이었다. 이래도 할래? 못 하겠지? 꼭 그런 눈으로 그는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월급 따위나 바라고 집을 나온 게 아니었다. 영화를 보자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집을 나온 이유는 영화를 원도 한도 없이 보고 싶어서였다는 쪽으로 가닥이 확 잡혔다. 밥이 아침에 한 끼면 어떻고 다섯 끼면 어떠랴. 게다가 라면이라니, 오호, 라면이라면 시골에서는 밥보다도 훨씬 귀하게 쳐주는 음식 아닌가 말이다. 국수도 시골에서는 누구네 시집 장가가는 날 외에는 구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이제부터 매일 먹게 되는 것이다.

신 나고 신 나고 또 신이 나서 영사실로 들어선 나, 그때부터 두 달여에 걸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게 고난의 길이라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은 그날 밤에 바로 들었다. 하루 종일 영화를 본다고 보기는 보았는데 내가 본 것이 영화인지 무슨 먹다가 버린 찌끄래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영사기는 반자동이었다. 필름 한 통이 다 돌아가면 그것을 손으로 꺼내서 물래 같은 것에 걸어놓고 손으로 핸들을 돌려서 되감은 다음 다른 영사기에 장착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그 되감기와 영사실 청소 따위들이 영사실 조수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필름을 꺼내서 되감은 다음 영사기에 장착하기까지의 시간이 '허천나게' 빨리 한다 해도 칠팔 분은 족히 걸렸다. 그러니 그 칠팔 분 동안은 영화를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키가 다 안 자라서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필름을 꺼내고 넣어야 하는데 빨리 하고 영화를 본다는 생각에 서둘다 보니 의자가 넘어져서 굴러 떨어지기 일쑤였다. 뭐, 그것까지도 좋았다. 참을 수 있었다. 중간에서 못 보고, 또 중간에서 못 보는 영화일망정 영화는 영화였다. 문제는 똑같은 그림에 똑같은 대사를 물리고 물릴 정도로 보고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루 종일 같은 영화 상영... 대사까지 외울 지경

그랬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무슨 놈의 극장이 같은 영화를 하루 종일 돌리고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란다는 듯 다음 날도 돌리고 있었고, 열흘 뒤에도 같은 영화를 돌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한 달 뒤에까지도 같은 영화를 돌리고 있었다. 뭔가 사기를 당해도 보통 사기를 당한 게 아니었다.

개봉관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내가 볼 때 극장 사람들이나 관객들이나 모두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무슨놈의 영화를 한 달 내내 같은 것을 보고 또 본단 말인가. 시골 면소재지에 들어온 가설극장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사기를 당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극장 측에서도 나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날마다 두세 번씩은 굴러떨어지는 꼬맹이를 데리고 뭘 할 것인가. 그렇게 극장을 나왔다.

극장을 나올 때만 해도 아직은 뭔가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을 갖고 그야말로 개처럼 여기저기 광주 시내를 쏘다녔다. 쏘다니다 보니 다리가 아팠고, 배도 고프고, 그러면서 문득 앞날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보나마나 아버지에게 맞아죽을 것이고, 광주 시내에 사람이 그렇게도 많건만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고,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그야말로 앞산도 첩첩 뒷산도 첩첩 꽉 막힌 인생길이었다.

끝도 안 보이게 늘어선 거대한 전남방직 공장이 멀리로 보이는 신안동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서 혼자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던가 어쨌던가. 열두 살 한참 팔팔하게 돌아다녀야 할 사춘기 소년의 신세 치고는 지금 생각해도 참 오지게나 앞뒤가 꽉 막힌 꼬라지였다. 그런데 그런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너 누구냐? 어디 살어?"

건방지게도 웬 소녀가, 아니 소녀처럼 작은 여인이 내게 하대말로 말을 붙이고 있었다. 열린 문을 한쪽 손으로 잡고, 다른 한쪽 손은 수건을 든 채 문 밖으로 내놓고, 발도 한쪽은 실내에 두고, 다른 쪽 발은 바깥으로 내놓고, 흡사 어디서 누가 오는지 내다보는 투의 묘한 자세로 서서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그 얼굴이 스마일 풍선 같았다.

그랬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그녀 뒤에는 역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마치 그녀의 어깨 위에 머리를 얹어놓은 듯한 형태로 서 있었다. 이발소였다. 나는 미처 어느 골목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발소 옆 골목이었다.

그 이발소 면도사 아가씨께서 창문으로 나를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하다가 참을 수 없어서 문을 열고 그렇게 건방지게 '너'라는 표현을 쓴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들의 '초청'을 받았다. 안으로 들어올래? 들어와서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봐, 아마도 그런저런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집 나온 소년으로 밝혀졌다기보다는 그들이 그렇게 이해하는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발 기술을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나왔고, 갈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 되어버린 나는 이게 어인 횡재냐 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일당'이 되기로 했다.

조건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추석에 한 벌, 설에 한 벌, 그렇게 일 년에 두 벌의 옷을 사 주고 약간의 용돈도 준다는 뭐 대충 그런 정도였지만, 나는 이발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만화책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랬다. 손님이 대기하는 장의자 위에 만화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반짝이는 내 눈이 그것을 발견했고, 그리고 쿵쿵 뛰는 내 심장이 말하고 있었다. 야아, 만화는 원도 한도 없이 볼 수 있겠다.

"수복아, 나 좀 데려다 줄래?"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극장에서 산산이 부서진 나의 부푼 꿈은 그렇게 해서 만화책으로 채워졌다. 실제로 나는 그 이발소에 있었던 다섯 달여 동안 그야말로 원도 한도 없이 만화배를 채웠다. 만화도 악당을 물리치는 권선징악형이나 추리소설 같은 것을 재구성한 내용을 좋아했다. 이때의 독서 경험이 아마도 훗날 사립 탐정이랄까 심부름센터랄까, 하여튼 흥신소 운영이라는 다소 도발적이고 일탈적인 사업구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주인은 내게 이발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기술은 개뿔이나, 하루 종일 손님들 머리 감기는 일만 하느라 팔이 부러질 지경이었다. 한참 지난 뒤에서야 알았다. 머리 감기는 녀석이 힘들다고 도망가 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굳이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눈에 띄는 녀석이 있으면 데려다가 그렇게 이발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달콤한 조건을 내세워서 실컷 부려먹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해도 내게 무슨 손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아직도 돈은 아니었으니까. 돈보다는 만화를 원도 한도 없이 볼 수 있다는 그 자체였으니까.

만화책을 빌리는 비용은 전적으로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발소 사장님이 부담했지만, 그것을 빌리러 가는 사람은 정아 누나였다. 웃으면 스마일풍선 같아지는 정아 누나는 차츰 나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내 세상이 열리기 시작한 셈이었다. 전에는 누나가 빌려온 것들을 일방적으로 읽어야 했지만, 이제부터는 적어도 절반 정도는 내 취향에 맞는 소재를 고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아 누나는 항상 깔깔대고 웃는 등으로 티 한 점 없이 맑기만 한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스물한 살의 그녀는 집에 갈 시간만 되면 남자들을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발소 안에서도 어떤 남자는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의 애인이 돼 달라는 둥, 작은 각시가 돼 달라는 둥의 말을 하기도 했다. 웃는 소리와 함께 농담처럼 말하는 것 같지만 농담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런 '놈'들은 날마다 한 번씩 출근을 해서 길지도 않은 수염을 깎는다는 구실로 의자에 발랑 누워서는 호심탐탐 그 못난 '손모가지'를 누나의 가운 속으로 들이밀 기회를 찾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발소 안에서는 보는 눈도 있고 등등 안전장치가 있었지만, 이발소가 문을 닫고 난 뒤에는 사정이 달랐다. 밤에 혼자 걷는 여자의 뒤를 따르는 남자의 발자국 소리에 겁을 먹은 누나가 집으로 바로 못 가고 이리저리 빙빙 도는 수고를 밤마다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 알았다. 어느 하루 깜짝 반가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인지 누나 스스로 내게 그런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한 거였다.

"수복아, 나 좀 데려다 줄래?"

그렇게 해서 나는 밤만 되면 그녀, 정아 누나를 호위해서 그녀의 자취방에까지 동행하는 희대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것은 남자 형제들만 우글거리는 속에서 살아온 내가 경험한 최초의 여자 냄새였다. 엄마의 냄새와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 그 무엇은 다른 무슨 설명이 필요 없는 그냥 보물이었다. 보물.  

"너도 남자지만, 남자를 조심해야 해. 허풍이 많고, 사람이든 무엇이든 자기 부하로 만들려고 덤비는 게 남자거든."

누나는 내 팔에 자기 팔을 꼭 끼고 종종걸음을 치면서 엄숙하게 중얼거리곤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신뢰하기도 어려웠지만 이발소를 드나드는 소위 단골손님이란 '놈'들의 짓거리를 보면서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슨 돈이 그렇게도 많은지 거의 매일 찾아와서 면도를 했다. 면도만 한다고 하지만 요금은 이발요금과 비교해서 그리 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날마다 찾아와서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서는 "김양아, 나 좀 만져다오"하고 능글능글한 목소리를 뽑아내는 거였다.

"징그러, 털이 숭숭 난 벌레가 내 허리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아."

틈만 나면 더듬는 단골손님의 손길을 누나는 그렇게 표현했다. 내가 보기에는 털 난 벌레 정도가 아니라 뱀 같았다. 저놈의 뱀을 면도칼로 확, 하는 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입속에서 중얼거려졌다.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나에 대한 누나의 신뢰는 깊어졌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목욕도 같이 다니게 되었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엄청 놀랐다.

"수복아, 나 오늘 목욕 갈 건데 같이 갈래?"

잉? 뭔 소리여, 목욕을 같이 가자고? 그때까지도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경천동지의 발언이었다. 이 누나가 미쳤는가, 왜 이러지? 나중에 알았다. 목욕탕 간판은 같아도 탕은 남자 여자가 따로 들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알았다. 이발소 단골들은 목욕탕도 단골로 거의 매일 드나든다는 것을, 그래서 정아 누나가 그들을 피해 다니느라 매번 진땀을 흘려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에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잡혀버렸다

이렇게 해서 남자 어른들의 본격적인 질투가 시작되었다. 이죽거리는 목소리로"니들 연애하냐?"소리가 나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짐짓 엄숙하게 어른의 목소리로 "니들에 인제 보니 목간도 항꼬 댕기더라 잉? 인간이 돼서 그러면 못 쓴다"는 따위 소리도 거침없이 나왔다.

참 야비한 어른들이었다. 대놓고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얼굴 훅훅 달아오르게 할 건 또 뭐람. 쓸데없는 질투의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함께 목욕한 것이 아니라고, 목욕탕 앞에까지만 함께 간 것일 뿐이라고 쓸데없는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내가 그러고 있으면 누나가 옆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 주었다.

"낫살이나 드신 분들이 꼬맹이 데리고 뭐하는 짓이에요?"

다른 때의 누나는 한없이 약해 보였지만, 내가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오면 그렇게도 거침없이 어른들을 향해 대들고 나서는 아주 용감한 전사가 되곤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그 누나를 통해서 내가 알게 모르게 배운 것은 아주 거대한 무엇이었다.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 번 더 해보는 넉넉한 심성을 그 누나가 내게 심어주었다고나 할까.

그녀로 인해서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두 살의 나이, 그 민감한, 아주 중요한 그 시기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내 나이 또래에 가출한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이 빠지는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누나와 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때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발소 사장님이 고향을 가기 때문에 이발소 문을 닫아야 했다. 누나도 신안군 어디라는 고향을 간다 하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고향행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고향에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십여 년이나 지나서 그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새마을운동 바람으로 이발소는커녕 거리 자체가 없어졌고, 누나의 고향이 신안이라는 것만 알 뿐인 내가 찾아가 볼 만한 곳은 참으로 아득하기만 했다.
#무단가출 #육십년대의이발소 #누나 #극장 #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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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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