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쇠러 가시나요? 고양이는 제게 맡기세요

명절연휴 '탁묘' 서비스를 하며, 우리 '아이들'을 생각한다

등록 2012.01.22 09:58수정 2012.01.2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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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거리의 길고양이들

거리의 길고양이들 ⓒ 조을영


어머니와 단 둘이 보내는 첫 설이다. 개 네 마리와 같이 살고 있었지만 개 두 마리는 좋은 곳에 입양 가서 우리보다 호사스럽게 휴가를 떠나는 팔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유독 귀여워하시던 강아지는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시고 한 달 후에 죽었으니 고작 일 년 만에 많지도 않은 식구가 단촐해졌다.


30대 초반의 나. 어정쩡한 나이의 여자 둘만 있으니 궁상스럽지 않을까 사람들이 마음을 써주시는데, 뭐 궁상스럽긴 한 게 맞다. 엄마라도 궁상스러움을 피해보라고 대구의 이모에게 보내려고 했는데 표를 구하지 못해서 궁상은 여전하다. 원래도 궁상스러운 건 여상하건만, 사람들이 이런 설 연휴에 더욱 염려해주시는 것은 아마 '적적하지 않을까' 걱정들 해서 그럴 것이다.

설 연휴라 하면 이 사람 저 사람 드나들고 복작복작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데, 분주하지 않으면 그 적적함이 실로 민망할 만큼 궁상스럽다. '궁상 × 적적 = 비관사'라는 답이 나오기 딱 좋은 분위기인데 다행히 이번 연휴에도 바쁘고, 지난 추석에도 굉장히 바빴다.

도대체 뭘 하느냐, 하면 대단한 건 아니고 비인가 출장 '탁묘' 서비스를 뛰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면 거창해 보이는데 실은 고양이 밥 주고 똥 치우러 가는 거다. 고정 고객은 아직 한 커플이지만, 얼마 전 고양이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시인 황인숙 선생님도 이 서비스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어쨌거나 지금 고정 고객 부부는, 아내가 버려지거나 다친 고양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업어 오는 바람에 벌써 고양이가 다섯 마리나 된다. 고양이들 벌써 7, 8세로 연로들 하셔서 여러 가지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

모두 떠난 서울, 고양이와 함께 명절을 쇠는 여자


고양이 키워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개처럼 이동용 가방에 들어가란다고 덥석 들어가고 그러지 않기 때문에 데리고 어딜 갈 수도 없고, 두 사람 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보니 어디 맡기려면 금액이 부담스러워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서로의 필요가 딱 맞아떨어졌다.

대가를 돈으로 받지는 않고, 아직 시범사업 중인 '김현진 연휴대비 출장 탁견·탁묘 서비스'의 서비스료는 고객이 꼭 주고 싶거나 내가 꼭 필요로 하는 것으로 받는다. 추석치 급료를 최근에 지급받았는데 '하룻밤 내내 술 마시며 언니에게 앵기기'였으니 내가 이득 보는 거래였던 셈이다.


어쨌거나, 아침저녁으로 고양이 밥 주러 다니며 여러분이 없는 서울을 볼 때마다 서울은 참 편해 보인다. 쓸쓸한 것이 아니라 쉬고 있다는 분위기. 그럴 때마다 텅 빈 서울에 남은 나는 딱 자유로울 만큼 적적하고, 딱 적적할 만큼만 자유롭다. 네온사인이 꺼진 서울의 맨얼굴은 생각만큼 차갑거나 외롭지 않다.

a  지난해 설을 하루 앞둔 날, 서울역에서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고향으로 내려가는 귀성객들에게 정책 홍보물을 건네주고 있다.

지난해 설을 하루 앞둔 날, 서울역에서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고향으로 내려가는 귀성객들에게 정책 홍보물을 건네주고 있다. ⓒ 유성호



지금은 아버지가 안 계시지만 본래 나에게 "기필코 올해는 시집 가라"고 탓하는 분은 아니었고, 어머니는 원래 애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 내가 시집가서 애 낳으면 자기가 봐주고야 말 것을 아시는 분이다.

아마 올해부터는 탁아 서비스가 추가되지 않을까 싶다. 작년에 친구들이 너무 예쁜 아가를 하나씩 낳았다. 나는 70억 인구에 내 유전자를 받은 아이를 보탤 생각은 전혀 없지만 보태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나는 아이를 안 낳겠지만, 지역 커뮤니티가 무너지면서 어느 집 아이가 어느 집 아이인지 몰라서 학교폭력이나 별일이 다 일어나는 작금의 사태를 '나는 애 없으니까 편하지 뭐야' 하고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다.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는다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지금까지는 '아니 누가 해줘야 낳지, 내가 양성생식인 줄 아냐? 혼자 애를 낳게' 하고 똑같이 퉁명스런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내가 내 아이를 낳아서 똑같이 육아전쟁, 그 다음에는 입시전쟁에 참여한다고 이타적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고양이든 아이들이든, 모두 '내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을까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녹즙을 배달할 때 본 부모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내 아이가 사회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다, 최근 미성년 납치 사건이 이어지면서 생긴 두려움까지.

학교보안관을 모집하고 학교에 들고 나는 사람들의 신상을 일일이 기록하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고 누가 누군지 모르면서 살아가는 이상 그 두려움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 아이를 낳아 직접 참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 붕괴된 지역 커뮤니티를 조금이라도 받쳐줄 정신적 공감대 같은 게 '모두가 모두의 아이를 키운다' 이런 것이 아닐까.

"집에서 아이만 보고 있자면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친구들과 공동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 아이도 아닌데 뭐하러 봐주냐"는 반응이 첫 번째다. "내 아이가 아니니 나랑은 상관없다"는 생각들이 서울을 점점 캄캄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탁아든 탁견이든 탁묘든 모든 애를 내 애처럼, 모든 개를 내 개처럼, 모든 고양이를 내 고양이처럼, 아니 '우리'를 바꿔 생각하는 것만이 도시에 조그만 숨통을 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이를 한 살 더 먹긴 먹었나보다.

고양이 밥 주러 가야겠다. 서울은 제가 잘 보고 있겠으니 여러분도 잘 다녀 오시기를. 내일 날이 개면 엄마와 평소 사람으로 넘쳐나던 번화가를 손 잡고 산책하려 한다. 이것이 서울의 적적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조그만 즐거움이기도 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덧붙이는 글 | 김현진 : 에세이스트, <뜨겁게 안녕> 저자


덧붙이는 글 김현진 : 에세이스트, <뜨겁게 안녕> 저자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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