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청량리청과물시장에서
조상연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았다가 녀석이 술에 취하더니 형님 잘 못했다며 무릎을 꿇고는 울고불고 눈물 범벅이다. 사람들 많은데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일으켜 세워놓고서 "그 많은 돈을 가지고 가서 어찌 이 모양 이 꼴로 사느냐"고 물었다. 횡설수설 잘못했다는 얘기 끝에 녀석의 말이 애기가 둘 있는데 일곱 살 배기 아들 녀석이 심장판막증이란다. 그것도 현재진행형이란다. 돈 벌어서 그 녀석 병원비 대느라 거친 음식만 먹어 똥 쌀 때마다 똥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단다.
그런데 아까 가만히 보니 녀석이 밥을 먹기 전에 성호를 긋고 있지 않은가? 피식 웃으며 내 돈 가지고 도망간 죄가 있어서 회개하느라고 꼴에 성당을 다니나보다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이가 없어 성당 다니냐고 물었더니 요즘 세례공부를 한단다. 내가 성당 다니는 것을 알고는 두 달 후에 세례성사가 있는데 대부를 서달란다.
'아, 이런 뭣 같은 경우가 있는가? 내가 이놈아 너 때문에 인생 황 되어버린 것 몰라?'
말없이 술만 목구멍으로 털어 넣다가 대부를 서주마 했다. 내가 어찌 하느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감히 흉내 내랴마는 하느님도 그의 죄를 용서 하셨는데 내가 뭐라고 그를 용서하지 못한단 말인가? 알았다며 그만 가자고 일어서는데 그 녀석이 술값을 내기에 지갑을 탈탈 털어 애들 과자나 사다주라며 건네주고는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