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아들 "박정희 각하, 믿기지가 않습니다"

37주기 맞아 '인혁당 사건 전시회' 진행

등록 2012.04.09 15:24수정 2012.04.0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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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2옥사에 마련된 '인혁당사건 전시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2옥사에 마련된 '인혁당사건 전시회'. ⓒ 김혜승


"각하, 저는 이번 인혁당 사건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송상진의 아들입니다. 저희들에게 민주주의의 건전한 교육을 시켜주신 아버지께서 인혁당 당원으로서 공산주의자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는 고(故) 송상진 열사의 자녀가 박정희 전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의 첫 구절이다. 본 편지 이외에도 '인혁당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여덟 분 열사의 유품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편지, 사진 등 갖가지 유품들은 열사들의 삶을 되돌아볼 값진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로 37주기를 맞는 '4·9 인혁당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라는 이름의 인혁당 사건 추모전시회가 8일 서울시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12옥사에서 공개됐다. 8일 찾은 추모전시회에는 8분의 열사들의 영정과 일대기, 유품,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요 시국사건과 관련한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다.

유족들의 커팅식과 함께 공개된 전시회에는 새롭게 제작된 8인 열사의 영정과 인혁당 사건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현당 사건으로 연루돼 감옥살이를 한 후 무죄로 풀려난 강창덕씨는 전시회를 둘러보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피가 선다 피가 서…. 이런 거 써낼 때는 설마 사형당할까 했지…. 특히 그때는 학생 신분이었는데…."

강씨는 열사의 유품 중 상고이유서를 보며 치를 떨었다. 주변에 있던 또 다른 이는 "이런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라며 "감옥을 나와 보니 집안이 쑥대밭이 돼 있고, 모든 증거가 사라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 때, 문익환 목사와 옆방을 나눠썼다는 강씨는 "감옥에서는 '통방'이라고 방과 방끼리 소통하는 방법이 있었다"며 "어느 날 방을 두드려 '누구쇼' 하니 '나는 문익환이오'라고 하더라"며 자신이 수감됐던 감옥의 내부를 설명했다. 그는 "75년에 수감 되고나서 37년 만에 이곳에 다시 와보네…"라며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a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2옥사에 마련된 '인혁당사건 전시회'에 공개된 상고이유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2옥사에 마련된 '인혁당사건 전시회'에 공개된 상고이유서 ⓒ 김혜승



a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2옥사에 마련된 '인혁당사건 전시회'를 둘러보던 강창덕씨. 강창덕씨는 인혁당 사건으로 연루돼 감옥살이를 하고 무죄로 석방됐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12옥사에 마련된 '인혁당사건 전시회'를 둘러보던 강창덕씨. 강창덕씨는 인혁당 사건으로 연루돼 감옥살이를 하고 무죄로 석방됐다. ⓒ 김혜승




"이거 이거 서도원 선생 아닌가? 옆에는 선생 부인이지?"

사건을 함께 겪었던 어르신들은 열사의 영정과 사진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진에 손을 데고 연거푸 쓰다듬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도 있었다. 어린 손자·손녀와 함께 전시회를 방문한 유족들은 전시품들의 얽힌 사연을 손자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4년은 한일회담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던 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국가반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 북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 반대 학생 데모를 배후조종했다"며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이후 1974년, 유신체제 반대 시위를 주도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을 '인혁당재건위'로 다시 지목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했다"는 혐의를 씌워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 구속했다. 구속당한 23명 중 8명은 사형이 선고됐고, 그로부터 18시간도 채 되기 전 사형이 집행됐다. 1975년 4월 9일 서도원, 도예솔,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총 8분의 열사는 그리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주장인 '북한의 지시 아래 조종했다'라는 혐의는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9월 '대통령소속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또 2005년 12월 7일,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 발전위원회'는 인권침해 및 조작 여부를 조사하여 신청인 등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행위, 인혁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작사실 등을 밝혔다.

즉, '인혁당 사건'이 권력자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방향을 미리 결정, 중앙정보부에 의한 고문과 이를 통한 증거 조작, 공판조서의 허위작성, 진술서의 변조로 이루어진 사건임이 비로소 밝혀진 것.

이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역시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 피고인에 대해 불법구금한 사실을 추가 확인함으로써 국가에 재심을 권고하였고 같은 해 12월 재심을 받아들인 법원은 2007년 1월 최종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이처럼 '인혁당 사건'은 실제로 '인혁당'이라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 존재하던 중앙정보부가 조작해 유신반대 시위자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유신독재권력에 의한 계획적인 '정권살인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박근혜 위원장, 와서 두눈으로 보라, 인혁당 사건의 처절한 흔적을"

a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인혁당사건 37주기 추모제'. 참석한 이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인혁당사건 37주기 추모제'. 참석한 이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김혜승



전시회 커팅식에 앞서 열린 '4·9통일열사 37주기 추모식'에는 열사의 유족과 관련자들을 비롯해 조준호 통합진보당 대표, 원혜영 민주통합당 의원, 송경동 시인 등이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번 추모행사는 재단법인 4·9통일평화재단(이사장 문정현)의 주최 하에 열렸으며, 이사장인 문정현 신부는 강정에서 추락 사고로 입원해 참석하지 못했다.

"4·9열사들의 죽음은 사법살인이다. 그러나 그 장본인인 박정희의 후손과 그 잔당 세력들은 여전히 이 땅의 권력을 틀어잡고 있다."

8일 열린 37주기 추모제에서 추도사를 맡은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은 이같이 말했다. '사법살인'이라는 그의 말처럼 '인혁당 사건'은 사형선고 후 18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집행된 사형으로 국제 사회에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됐다. 그러나 이 사건과 관련 있는 판사, 검사, 중앙정보부 관계자 중 그 누구도 잘못을 고백한 이가 없다.

이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13일 박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된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유족과 재단은 분노를 표했다. 그들은 성명서 낭독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가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와서 보라"고 말했다.

"8분의 인혁당 관련 사형수들은 '본의 아니게 희생된' 사람들이 아닌,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정권의 조직적, 계획적인 정권 살인의 희생자이다."

4·9 통일평화재단 측은 박 위원장에게 "역사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으로서 양심이 한줌이라도 남아 있다면, 역사와 국민 앞에 그 아버지의 죄과를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민주주의에서 반민주주의로 거꾸로 돌아가고 있으며 반민주주의의 독재자 박정희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우려하며 "민주주의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국민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4·11 총선에 임하는 국민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한편, 4·9평화통일재단을 비롯해 13개 단체의 지원속에 열린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인혁당사건 전시회는 서울시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제12 옥사에서 지난 8일을 시작으로 5월 13일까지 36일간 열릴 예정이다. 또한 4월 14일과 5월 12일에는 한홍구 교수와 함께하는 서대문 독립공원 올레 시간도 마련돼 있다.

전시회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인혁당 희생자 생전의 모습, 유품, 박정희 시대 관련 자료와 함께 김정헌, 임옥상 등 26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회화 및 설치 작품도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인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추모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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