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마다 서원, 유학의 향기 가득

의성 여행 (30) 봉양면 답사

등록 2012.04.27 17:56수정 2012.04.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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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금산서원

금산서원 ⓒ 정만진


'마늘소 먹거리 타운'과 '약수 온천'을 자랑하는 의성군 봉양면의 행정중심지 도리원에는 또 다른 자랑거리가 하나 더 있다. 비단[錦]같이 아름다운 산(山)이라는 뜻의 금산(錦山)자락에 세워져 있는 서원이다. 그 이름은 금산서원.

금산서원은 약수온천에서 내려와 쌍계천에 닿기 이전, 중앙고속도로 교각 사이로 들어가면 나온다. 얼핏 길이 없는 듯하지만, 고속도로 교각 아래에는 '금산서원' 네 글자가 새겨진 작은 화강암 비석 하나 서 있다. 강을 따라 비포장 길을 5백m쯤 들어가면 오른쪽 산비탈에 웅장한 전통건물들이 나타난다. 그곳이 바로 금산서원이다.


갓 머리를 감은 젊은 선비 같은 금산서원

금산서원의 내력은 아직 모르지만,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방문객의 입에서는 찬탄이 저절로 일어난다. 우선 넓고 깨끗한 잔디밭이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여러 채의 전통가옥들이 보여주는 단아한 모습은  마치 갓 머리를 감고 나온 젊은 선비의 분위기를 풍긴다. 뒤돌아서서 보면, 쌍계천과 주변 일대의 광활한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절묘한 위치도 놀랍다. 금산서원에서, 대도시를 금방 떠나온 '현대인'은 문득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는 듯한 '자연의 향기'에 취한다.

서원 강당 옆에 세워진 빗돌을 읽어보면, 금산서원의 주벽은 신지제 선생이다. 주벽(主壁)이란 여러 분을 제사지내는 경우 '가장 어른이 되는 분의 위패'를 말한다. 위패는 '제사에 쓰려고 만든,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기록한 작은 나무'를 가리킨다. 오봉 신지제 선생은 고려말 충신 신윤우, 신우 선생의 후손으로, 봉양면 소재지에 마을을 개척하고 '화전리(花田里)'라는 이름을 붙인 바로 그분이다.

금산서원은 신체인 선생도 모시고 있다. 본래 이곳 금산서원의 자리는 1776년 신체인 선생이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지어 후학을 키웠던 자리이다. 1912년에 이르러 건물이 무너지고 현판만 남게 되었는데, 후손 신진욱이 1977년에 중건하였다. 유림의 공의를 얻어 서원으로 승격된 때는 1981년의 일이다.

a  오봉종택

오봉종택 ⓒ 정만진


신지제 선생 유적 답사를 위해 오봉종택(梧峰宗宅, 경북도 문화재자료 187호)을 찾아간다. 6동의 조선시대 전통가옥으로 이루어진 오봉종택은 금산서원에서 쌍계천을 내려다볼 때 강물 건너편에 보이는 구미리에 있다. 종택 바로 뒤에는 사당(문화재자료 187호)이 있고, 오른쪽에는 담장 너머로 아주신씨 종가인 낙선당이 자리잡고 있다.


신지제는 27세에 문과 급제 후 예안 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안동현감을 겸임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전주판관 때에는 그 지역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는 등 곳곳에서 훌륭한 선정을 실시하였는데, 특히 의성에 근무할 때에는 봉양면에 장대서원(藏待書院)을 건립하여 지방고을 자제들의 교육에도 큰 힘을 썼다. 뒷날 승지(지금의 대통령 비서)를 역임하기도 했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 시대 18등급의 벼슬 중 5등급)에까지 올랐다. 신지제 부자는 조선 중기 의성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학행(學行)과 명망이 있어 조정에서나 향촌에 있어서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다.

조선 중기 의성의 대표적 선비 신지제


신지제는 어렸을 때 김언기(金彦璣)에게 배웠다. 같이 공부하는 제자들은 70명이었는데, 산에서 땔감을 가져와 서당에 불을 지피고 살았다. 하루는, 나중에 참판(參判, 현재의 차관)이 되는 권태일(權泰一), 절도사(節度使, 현재의 장군)가 되는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갔다. 의성군 홈페이지에는 선생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행적 몇 가지가 실려 있다.

a  장대서원

장대서원 ⓒ 정만진

마침 한 노인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 신지제는 친구들과 함께 가서 땔감을 구걸하였는데,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급기야 욕을 하였다. 함께 간 친구가 화가 나서 노인을 밀쳤다. 그런데 노인이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노인의 아들이 관가에 고소하였고, 밀친 친구는 바로 체포되었다. 신지제는 친구에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으니 한 사람에게 죄를 씌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결국 셋이 함께 관가에 들어가서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사또가 한참 지켜보다가 노인의 자식에게 '이 세 아이들은 모두 훗날 재상감이다. 네 아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한번 용서하라.'면서, 아이들에게 노인의 자식과 함께 장례를 치르라고 명령하였다.

신지제는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임금자리에 올랐을 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그는 정의감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몸가짐을 스스로 엄하게 단속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가를 소개해 달라고 요구하면 결코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화를 입었다.

당시는 정인홍(鄭仁弘)의 권세가 매우 높았다. 정인홍은 광해군 때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이었다. 공은 그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6년 동안 단 한 번도 더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마음속으로 공의 정치에 탄복하고 감히 그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도 공이 직접 세운 장대서원에서는 그를 잘 모시고 있다. 장대서원이 세워진 곳은 나중에 동네이름도 장대마을로 변했다. 장대마을은 봉양에서 금성면의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가다가 중간쯤에 있다.

'옳은 길'을 보여준 분명마을의 아내와 딸, 그리고 개

장대마을이 끝나면 바로 분명(分明)마을이 이어진다. 두 마을 사이의  왼쪽 산비탈 외딴집에 '숨어 있는' 전설이 흥미로워 그 사연을 여기 적어둔다.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인류는 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a  분명 마을의 열녀, 효녀, 의구를 기리는 작은 비석

분명 마을의 열녀, 효녀, 의구를 기리는 작은 비석 ⓒ 정만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들이 여기까지 쳐 들어왔다. 사람들은 놀라 황급히 피난을 갔지만, 이 마을 사람 정태을(鄭太乙)의 처 박씨(朴氏)와 그의 두 딸은 불행히도 왜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군들은 짐승처럼 이들에게 덤벼들었다. 박씨는 왜군을 당할 길이 없었으므로 죽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두 딸도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시퍼런 칼을 휘둘러 두 딸이 먼저 죽었다. 박씨도 스스로 칼로 몸을 찔러 자결하였다. 그토록 짐승같이 설치던 왜군들도 그 광경 앞에서는 혼비백산하여 물러가 버렸다.

하지만 왜군이 물러갔어도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마을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떼가 날아들어 시체를 해치려 했다. 박씨가 기르던 개가 이것을 보고는 맹렬히 달려들어 까마귀들을 내쫓았다. 그러기를 사흘째, 주인의 시체를 지키던 이 충견도 마침내 굶주려 죽고 말았다.

왜란이 끝난 후인 1612년(광해군 4), 나라에서는 박씨에게 정려(旌閭)를 내려 표창하였다. 그리고 주인을 충실히 지키려한 개도 의구(義狗)라 칭송하면서 따로 작은 비석을 세워주었다. 지금도 분명리 입구의 그 외딴 집으로 들어가는 산비탈에는 박씨와 의구의 비석 둘이 나란히 서 있다.

큰 비석에는 '烈女鄭太乙妻朴氏之閭 孝娘 鄭 鄭', 작은 비석에는 '義狗'가 새겨져 있다. 정태을의 아내 열녀 박씨와, 효성스런 두 정씨 낭자, 그리고 의로운 개를 기린다는 뜻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비석들이 세워진 때가 사건 이후 불과 20년가량 뒤인데도 두 딸의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벌써 그 이름을 잊었던 것일까.

아니다. 부인도 '박씨'라고만 기록한 데서 그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이자 본인 스스로도 이름 높은 시인이었던 허난설헌의 본명이 초희(楚姬)라는 기록을 보면, 당시의 여자들에게도 이름이 있기는 있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는 데 있다. 생각해 보자. 그대는 신사임당의 이름이 생각나는가?

신사임당의 이름은 무엇인가?

봉양면의 끝자락, 거의 의성읍에 닿아 있는 분토리에 가면 단구(丹邱)서원을 볼 수 있다. 단구서원은 신석우(1816~1881) 선비가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단구서당을 세운 곳이다. 그 후 서당은 신적도(1574~1663), 달도(1576~1631), 열도(1589~1659, 최초의 의성군 역사서인 <聞韶誌> 저술) 3형제의 창의 정신과 신적도의 아들 신채(1610~1672)의 유학사상을 기리는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훼철할 때 없어졌다가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공적비에 따르면) 1989년 대전시장 신기훈의 주관으로 묘우(廟宇)를 새로 짓는 등 본격적으로 복원되었다. 땅은 후손 신원효가 기증하였다.

a  단구서원

단구서원 ⓒ 정만진


금산서원, 오봉종택, 장대서원, 단구서원을 둘러보았다. 봉양에는 선비를 기리는 곳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오봉종택과 단구서원의 중간쯤 도로변에는 '조문국 연구원'까지 있다. 조문국연구원은 향토사학자 김종우 선생이 쉬지 않고 '의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곳으로, '르네상스 문흥, 작은 도서관'이라는 현판도 달고 있다. 누구든지 의성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리로 달려가면 되니 '현대판 서원'이나 다름없다.

a  조문국연구원(전화 054-832-4293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문흥4리 2-7번지)

조문국연구원(전화 054-832-4293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문흥4리 2-7번지) ⓒ 정만진

그렇다고 책만 보며 살 수는 없다. 그것도 '의성 마늘소 먹거리 타운'이 특별히 조성되어 있는 봉양 아닌가. '약수 온천'을 찾아 따뜻하게 몸도 가꿀 일이다. 그리고 온천에서 나와 마늘소에 소주 한잔도 곁들이자.

단, 다음의 일화만은 꼭 기억할 일이다. 뒷날 단구서원에 모셔지는 제자 신열도가 장대서원의 이름을 지은 스승 장현광에게 말씀드린다.

"식사는 적게 하시면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니, 혹 이로 인하여 건강이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승의 건강을 걱정하는 제자 신열도에게 스승 장현광이 대답한다.

"술의 힘이 노인을 보양함은 어린아이가 젖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대의 말이 또한 좋으니, 내 마땅히 유념하겠노라."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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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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