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학교' 더러워서 그만두려 했는데...

[나의 '멘붕' 극복기①] 다시 청소도구 든 국회의원 낙선인 김순자

등록 2012.05.05 14:56수정 2012.05.0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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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던 김순자 지부장. ⓒ 김혜란

지난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던 김순자 지부장. ⓒ 김혜란

"내는 가수가 되고 싶었지. 사람들이 내보고 노래 참 잘한다고 해. 내가 없으면 좀 재미가 없다고 할 정도로 유머있고, 노는 걸 좋아하고, 농담도 잘하고, 이런 스타일이지. 촌에서 컸으니까 (가수)하고 싶은 맘이 있어도 길이 안 열렸지."

 

어렸을 적 꿈은 가수였다. 그러나 전업주부로 살았고 평생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쉰 살, 먹고 살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청소노동자가 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세상은 모질었다. 그냥 참아야 하는 줄 알았다. 우연히 노동조합에 가입한 뒤 세상에 눈을 떴다.

 

분노는 희망이 되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니 현실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의 나이 예순, 마이크를 잡았다. 노래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노동자가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다 듣게 하고 싶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김순자다.

 

김씨는 지난 19대 국회의원선거 때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나섰지만 국회 입성에는 실패했다. 진보신당의 정당 득표율이 3%에 못 미쳐서다. 4월 12일 오전, 김씨는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출근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커피도 마시고, 건물 구석구석을 청소합니다. 세상을 빛나게 하는 청소노동자 맞지요?"

 

많은 사람들이 선거 후 '멘붕(멘탈 붕괴)'을 토로할 때 김씨는 묵묵히 일터로 돌아갔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낙선 후 심경을 "시원 섭섭하다"고 밝혔다.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4월 25일 울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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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5일, 김순자 지부장이 울산과학대 1층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 김혜란

지난 달 25일, 김순자 지부장이 울산과학대 1층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 김혜란

김순자씨를 만난 곳은 울산과학대 1대학관 509호 '용역관리실'이었다. 용역관리실은 강의실 사이에 위치한 세 평 남짓한 탈의실 겸 휴게실이다. 그런데 문패는 왜 '용역관리실'일까. 

 

"학교 측에서 단 건데, '노동조합사무실'로 바꾸고 현판식 한 번 해야죠."

 

울산 토박이인 김씨는 경상도 사투리로 거침없이,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가수가 꿈이던 소녀... "자기 힘으로 세상과 삶을 변화시켜야"

 

김씨는 1993년 남편과 사별한 후 살던 집에서 세를 받아 생활했다. 하지만 점점 형편이 어려워졌다. 2003년 딸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당시 그의 나이 50. 직장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청소용역업체 문을 두드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삶은 더 빈곤해졌다. 당시 임금은 월 60만 원.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더 많이 일을 하고도 월급은 3분의1이었다. 점심도 안 주고 휴게실도 없었다. 당직수당 없이 한 달에 서너 번 당직도 섰다. 청소 외에도 여러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일도 일이지만 관리자의 '횡포'가 심했다. 청소노동자 11명에 관리자 4명이 붙었다. 관리자는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했다. "우리말 안 들으면 해고다. 똑바로 하라"는 말을 자주 들어야 했다. 무조건 참아야 하는 줄 알았다.

 

"부당한 대우는 말도 못 하지. 여름이었어요. 내가 탈의실에서 까만 '나시'를 입고 웃옷을 어깨다 걸치고 있으니까, 남자 관리자가 문을 확 여는 거예요. 내를 보고 복장이 불량하다고 베개를 집어 던지고.... 내 성격에 '아니 반장님, 여자 탈의실 오면 노크하고 들어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 말 하고 싶었죠. 근데 그러면 일을 못 나오게 하니까, 그만둬야 되니까 참았지. 그날 내 수모당한 거는 말도 못 합니다. 내 얼마나 억울했으면 집에 가가 밤새도록 얼매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 그때 그만둘라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 동료들이 '언니야 우짜노. 더러운 게 돈 아이가. 참고 함 해보자' 이러면서 달래더라꼬."

 

사투리 리듬을 타며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어떤 아줌마는 다리가 좀 아팠는데 반장들이 '다리 아퍼가 일 제대로 못 한다'고 난리를 치고.... 그 당시에는 더러워서 나간 사람들 많아요. 며칠 하다 나가고 한 달 하다가 나가뿌고, 이런 상황이었지. 임금 적지, 인간대접 못 받지.... 있을 이유가 없었지."

 

김씨도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는 생각을 하루 열두 번도 더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이었다. 여기를 나가도 다른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2006년 6월 13일 직접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민주노총에서 노조를 결성하자는 권유를 받은 후였다. 그때까지 비정규직도 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권유를 받자마자 "우리도 노조를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노조 활동하면 해고된다"는 말을 들은 터라 겁이 났다. 6월 초에 먼저 노조에 가입한 같은 학교 경비원들을 보고 용기를 냈다.

 

"분노는 늘 있었지. 있어도 비정규직은 참아야 되는 갑다 싶었던 거지. 살림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알아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2006년에 노동조합하면서 '아, 이기 잘못된 거를 말할 데가 있구나' 바로 거를 알게 된 거지."

 

노조 결성 후 처음으로 한 일은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거였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 탓에 밥을 사 먹는 건 부담이었다. 도시락을 싸와도 먹을 공간이 없었다. 무작정 학생식당으로 가 외상으로 3개월간 점심밥을 먹었다. 학교 측에서 돈을 내라고 성화였지만 굽히지 않았다. 결국 같은 해 11월부터 학생식당에서 따뜻한 점심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투쟁은 점심밥, 휴게실, 당직비 등의 권리를 돌려주었다. 삶은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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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간의 투쟁으로 2006년 11월 1일 부터 학생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김순자 지부장이 조합원 7명과 함께 학생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 김혜란

3개월간의 투쟁으로 2006년 11월 1일 부터 학생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김순자 지부장이 조합원 7명과 함께 학생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 김혜란

그러나 밥그릇은 곧 깨졌다. 2007년 2월 23일, 해고를 통보받았다. 수없이 학장 면담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복직 투쟁에 나섰다. 처음엔 투쟁 방법조차 몰랐다. 다른 노조에게 물으니 "단식, 삭발 아니면 목을 매라"고 했다.

 

하지만 아줌마들이 잘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관 지하에서 청국장을 끓였다. 고등어도 지지고 젓국도 끓였다. 부채로 냄새를 위로 올려 보냈다. 당시 노조에서는 10명이 투쟁중이었는데, 학교 측에서는 60~70명이 와서 욕을 퍼부었다. 조합원들은 세제를 바닥에 뿌리고 물을 퍼붓는 것으로 대항했다.

 

김씨는 그날을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하에서 밖으로 끌려나온 이후에도 본관 앞에 텐트를 치고 76일간 농성을 벌였다. 울산과학대 이사장은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다. 대선과 총선이 다가오면서 학교 측은 협상에 나섰다. 2007년 6월 1일 밤, 7차까지 이어진 교섭 끝에 복직과 함께 고용보장 약속을 받았다.

 

"정치는 현장에서부터... 비정규직의 희망이 되겠다"

 

이때의 승리로 다른 세상이 보였다. 고통은 충분히 겪었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나게 놔둘 수 없었다. 그가 노조를 만들고 싸워서 권리를 찾은 것처럼 다른 청소노동자에게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는 국회의원은 생각도 못 했어요. 청소하고 노조만 열심히 하고 집에 살림만 살고 이랬는데. 그래도 이런 생각은 좀 있었어요. 우리는 노조 해서 이만큼 권리를 찾고 있는데 노조 없이 그냥 무권리 상태로 있는 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내가 그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너무도 잘 알거든요. 그래서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를 홍보도 하고 함께 해야겠다는 마음은 항시 잠재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진보신당으로부터 국회의원 출마를 제안 받았다. 그는 정치를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지만 마흔 즈음부터 품게 된 작은 마음을 고백했다. 작은 마음은 눈사람처럼 커졌다.

 

"꿈은 가수였지만 때로는 이런 마음도 조금 있었지. 우리 동네 임명숙씨라 하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 시의원도 나가고 구의원도 나가고 이랬어요 여잔데. 가끔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정치계에 발을 디디는 걸 보니까는 내도 가끔 욕심났었지. '내도 많이 배우고 했으면 정치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공부를 함 해볼까' 이런 생각도 해봤지."

 

그러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정치는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다. 조합원들은 걱정부터 했다. "언니가 나간 뒤 학교에서 탄압하면 어쩌나"하는 게 이유였다. 김씨는 망설였다.

 

"(진보신당에서 제의를 받고)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반반이었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겁도 나고. 시의원 구의원도 아니고 국회의원을 하라니까 더 얼떨떨한 거지."

 

국회의원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계기가 있었다.

 

"부산 고신대 가서 '내가 국회의원 출마하려고 한다'니까 거기 청소노동자들이 너무 좋아해 주는 거예요. 대리만족 같은 거 있잖아요. 집회 나가면 연대하는 동지들이 '정치는 현장에서부터!' 이런 이야기 하는 거를 많이 들었거든. 이상하다 이기 무슨 말이고? 난 이해를 잘 못했어요. 근데 거기를 딱 가보면서 내가 느낀 거지. 아 '정치는 현장에부터'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구나. 아, 이게 바로 정치라는 거구나. 그 광경을 보고 내 확신을 얻고 딱 수락을 했지."

 

세상은 정치인들이 바꾸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기다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스스로 국회의원이 되어 비정규직 노동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김씨는 선거 유세기간 동안 전국의 비정규직과 만나 "함께하려고 왔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만 정치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들한테 맡겨놨더니 우리의 삶 무엇이 달라졌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보통 사람들이 정치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야 진짜 일반 사람을 위한 정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노동자뿐만 아니라 중공업 하청노동자도, 정규직도 올라와야 되고. 각계각층에서 올라와가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 올바른 정치가 된다고 보거든요. 국회의원들은 잘 모르잖아요.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은 비정규직 심정을 모르죠. 그러니까 안 바꾸지. 자기들 배부른데 바꿀라고 하겠어요?"

 

하지만 국회 진출은 실패했다. 김씨는 일터로 돌아왔다. 그는 "노동자는 국회의원 한다고 이득도 없고 떨어진다고 손해 볼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이 더 크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낙선 후 진보신당에서 비정규직 위원장을 맡았다. 김씨는 울산과학대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울산지역 비정규직들을 설득해 노조를 결성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울산 달성공단, 울산공항, 언양고속도로 휴게소 등에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다. 대부분 고용불안, 저임금을 감내하고 있다. 

 

김씨는 "이들을 설득해 노조를 결성하고 정당한 권리를 찾도록 도와줄 것"이라며 "진보신당에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싶다. 혼자서는 안 되니까 도와달라고 어제(4월 24일) 정책국장과 만나 얘기했다. 목표는 비정규직법을 바꾸는 것"이라고 전했다.

 

다음 국회의원 도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또 도전하고 싶지만, 당락과 관계없이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비정규직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조결성 후 처음 느낀 인간다운 삶

 

"지금 가장 힘든 점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의 권리를 찾으려고 아무리 아우성을 해도 먹히지 않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느낌이다"며 "그런 게 심적으로 힘들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여러 회사는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기만 하면 해고한다. 그 탓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용기를 내기가 더 어렵다.

 

"노동조합도 교육의 문제라고 나는 보거든요. 어떤 선진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모의교섭도 다 해본답니다. 다 교육을 한다는데, 우리는 대학 나온 사람들도 노조를 왜 하는지, 노동3권이 뭔지, 이것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우리한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이거를 안 가르치니 자기가 비정규직이면서도 모르고 있는 거라. 부당하다고 느껴도 노조 하믄 해고가 되니까 겁이 나가 못하는 거지. 참고 있는 거지."

 

또 김씨는 "자기가 비정규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돈 있는 사람들이 법으로 정해놓은 거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며 "자기 있는 자리에서 제대로 목소리 내고, 제대로 노조해서 내 권리를 찾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노조가 있으니 10년간 이 일을 했지, 노조 안 했으면 벌써 그만뒀다"고 말했다. 노조를 하기 전 삶은 삭막했다.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함께 하는 동지들이 생기고 삶이 달라졌다.

 

"처음 투쟁할 때가 2월이었는데 엄청 추웠거든요. 난 연대하는 동지들을 그때 처음 봤어요. 학교는 6~7년간 더러운 거 치워준 우리를 해고시키는데 이 사람들이 함께 투쟁해줄 때, 내 형제도 그렇게까진 안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살고 있구나, 참 살아볼 만한 세상이구나, 이런 걸 처음 느꼈지요".

 

낮 12시가 되자 청소노동자 8명은 다 함께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2006년 '밥그릇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점심이다. 자리에 앉은 지 5분이나 지났을까. 노동자들은 벌써 밥을 다 먹고 일어났다. 왜 이렇게 밥을 빨리 드시냐고 물었다. 조합원들은 "옛날 습관이 들어서 그런다"고 했다. 노조가 없을 때 관리자들은 밥을 빨리 먹으라고 늘 재촉했다. 겨울엔 추워서 찌개라도 데워 먹으면 냄새 난다거나 끓이는데 시간 걸린다고 못 먹게 했다.

 

청소노동자는 한국 사회 전체 임금노동자 중 5번째로 많은 약 43만 명에 이른다. 어느 건물에나 청소하는 노동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들이 쉴 공간조차 없는 곳이 많다. 찬 도시락을 계단이나 창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먹기도 한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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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5일 오후, 사측과 만나 상여금 300%, 근속수당 신설,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 김혜란

지난 달 25일 오후, 사측과 만나 상여금 300%, 근속수당 신설,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 김혜란

최저생활비 150만원, 임금은 95만원... "나머지는 굶으라 말이가 머꼬"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주 5일 근무하고, 당직을 월 두 번씩 서서 월급으로 약 95만 원을 받는다. 김순자씨는 "최저생활비가 150만 원이다. 우리 월급이 100만 원도 안 되면 나머지는 굶으라 말이가 머꼬"라며 "아무리 안 줘도 그만큼은 줘야 되는 건데, 학교 측은 단순근로라 못 준다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당일도 오후 3시에 사측과의 5차 교섭이 있었다. 노조 측은 상여금 300% 지급, 근속수당 1만5000원 신설, 최저임금 시간당 1500원 인상을 요구안으로 만들었다. 

 

교섭은 민주노총 울산지부 사무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김씨는 "협상은 실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다음 주에 상여금 200%, 근속수당 1만 원 등 수정안으로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전했다.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가수가 되고 싶다는 김순자씨. 가수와 국회의원 중에 뭐가 더 하고 싶을까.

 

"정치는 될 수 있으면 똑똑한 사람들이 해야지. 내 같은 사람이 정치를 안 하는 시대가 오면 좋지."

 

김순자씨는 비록 가수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희망의 노래를 불러주려 한다. 총선이 끝난 뒤 많은 사람은 '멘붕'을 외쳤다. 낙선한 김순자씨는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출근해 청소도구를 들었다. 얼마 뒤, 울산과학대 이사장인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열겠다"고 말했다.

 

도대체 희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25일 저녁, 비바람이 불던 울산을 떠나왔다.

#김순자 #멘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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